CHAPTER 3. 운동 – 기획 인터뷰 : ‘서울시청 무지개 농성’

Chapter 3. 운동 기획 인터뷰

일시    2015년 3월 11일
인터뷰이    나라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무지개농성 기획단
인터뷰어    스밀라  |  00 그라운드

 

나라 님의 소개와 무지개 농성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설명 부탁드려요. 

저는 ‘동성애자 인권연대’에서 최근에 이름이 바뀐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활동가고, 직책은 운영회원이에요. 3월부터 상임활동가로 일하고 있어요. 작년과 재작년, 2년동안 ‘무지개행동’이라는 연대체의 집행위원에 동인련 담당자로 파견을 나갔는데, 그렇게 있다 보니 농성이 논의될 때 참여했어요. 서울시민인권헌장이 제정되고도 서울시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부정하는 상황 때문에 항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는데, 여러가지 이야기들 가운데 결과적으로 로비 점거로 의견이 모아져 농성에 들어가게 됐어요. 특히 서울시장 박원순의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결정적으로 단호한 행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죠.

 

점거에 돌입하기까지의 논의 과정에 30여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연대체에 소속된 분들이 참여하신 건가요?

네. 무지개행동에 스무 개가 넘는 단위들이 참여하고 있어요. 성소수자 인권 단체 대표적인 곳들 네 군데랑, 언니네트워크, 공익인권재단 공감, 퀴어문화축제, 대학모임연대, 정당 성수수자 위원회 등등. 못 오신 곳도 있지만, 한 단위에서 여러 명씩 논의에 참여한 경우도 있고요. 11월 28일에 인권헌장이 통과되고 난 뒤에는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라든지, 그 전부터 인권헌장에 공동으로 대응해오고 있었던 분들과 같이 논의를 하게 됐죠.

 

6일 동안 농성이 진행됐다고 들었어요. 보통은 농성장에 몇 명 정도가 오셨나요?

첫날 150명 정도 왔다가 200명, 300명 이렇게 늘어났고요. 제가 보기에는 평균 200명? 그런데 그것도 저녁 집회 때 집계한 거고, 낮에 왔다 갔다 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런 거 따지면 총 수천 명 정도 방문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주말에는 계속 사람이 많았고, 평일 낮에는 수십 명, 저녁에는 늘어서 2,300명 되고 했죠.

 

농성에 반대하는 입장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논의 과정에서 농성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던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제일 중요했던 것은 박원순 시장 발언이 알려지면서,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정서가 커졌기 때문이에요. 그 전에는 행동 이후 여론의 반응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면, 그 발언은 열 일을 제쳐 두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분위기를 만들었죠. 그 이전 논의 과정에서 우려를 표명했던 분들도 입장을 바꾸는 계기였어요. 단지 몇몇 공무원의 문제라거나 절차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분명한 태도에서 도출된 결론이라는 게 명확했던 것이고, 그런 이상 성소수자 운동에서 분명하게 항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거죠.

백 퍼센트가 농성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어요. 마지막까지도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극소수였죠. 어쨌든 다수가 하고자 했던 결의가 있었기 때문에 한 단체의 반대 때문에 들어가지 못할 수는 없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당시엔 무지개행동 소속 단위가 아닌 다른 인권 단체도 함께 있었는데, ‘농성단’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죠.

사진 출처: 친구사이

점거 농성이라는 게 성소수자 운동에서는 낯선 방식이잖아요. 트위터로 소식을 접했을 때 개인의 연대가 많았던 것 같은데 실제로도 단위 외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많았는지 궁금해요.

굉장히 많았어요. 단체나 소속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혹은 친구들끼리 소식을 듣고 오신 분들. 후원해주신 분들도 많았고요. 지방에서도 오고, 주변의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에 시청에 들러본다거나.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lgbt 친구들도 이런 곳에서 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많이 왔어요.

 

그분들을 농성장으로 모이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시장의 말이 굉장히 공분을 샀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 같고, 시청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 성소수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굉장히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아요. ‘우리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 ‘나도 가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달까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목격하고 싶고, 그 일부가 되고 싶고,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촛불시위가 벌어졌을 때, 전체적인 대의에 동의하더라도 행동에 나서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걸 보고 ‘나도 한 번 가볼까?’ 마음 먹었던 경우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비슷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짧게 끝났기 때문에 더 길어졌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개인 단위로 오신 분들이 자발적으로 뭔가를 만들어서 농성 시간표를 채우며 진행이 됐던 거죠?

농성의 루틴은 나름대로 조직해서 진행한다고 하긴 했는데 엄청 타이트하게 짜임새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오신 분들이 자체적으로 피켓이나 벽에 붙이는 걸 계속 만들기도 했고요. 단위들이 돌아가면서 사회 보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일인 시위라던가 아침 선전전, 이런 것들도 현장에서 제안해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하고 그랬죠. 저녁 문화제 같은 게 계속 진행됐는데 참여하신 분들이 자청해서 공연하기도 하고. 발언을 원하는 분들이 되게 많아서 다 못 듣고 그랬었어요.

 

여태껏 참여하셨던 단위들로 조직되는 운동들과 개인들이 많이 참여했던 무지개 농성을 비교하면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을까요?

질적인 부분의 차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사실 성소수자 운동이 아직까지 소규모고, 특히 조직되어 있는 곳들은 굉장히 적다고 보시면 돼요. (운동이) 20여 년 됐지만 여전히 단체에 속한 사람은 소수고, 단체와 연결이 돼 있거나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멤버쉽이 높지 않은 경우도 많고, 실제로 큰 규모의 단체는 거의 없고요. 소규모 모임 같은 게 늘어나는 상황이긴 했는데, 2007년 차별금지법 때나, 2011년에 학생인권조례 농성 때나, 기존의 조직들이 예상했던 규모보다는 컸어요.

일상적으로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보였던 사람들의 참여가 운동이 시작됐을 때는 항상 중요한 요소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모든 운동에서 조직된 부분이 조직되지 않은 부분보다는 작지만, 아무튼 사회적으로 성소수자 이슈라고 할만한 것들이 떠올랐을 때는 그런 미조직된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그 운동의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조직력이 약하다는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기존 단체들의 역량만으로 그렇게 눈에 띄는 활동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까요.

 

농성 중에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가 있나요?

너무 많죠. 사실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정신이 없어서… 이창근 동지가 와서 강연했던 게 기억에 남네요. 의미가 있었고. 그리고 이런 거죠, 인권활동가 같은 분들이 매일매일 와서 구경하고 서 있는 것. 인권헌장과 관련된 문제였잖아요. 인권헌장제정 시민위원회 전문위원 중에 농성장에 거의 매일 와서 보다 가신 분들도 있어요. 발언도 한 번 안 시켜줬는데. 그런 거 보면서 저 사람이 여기 참여하면서 뭘 느끼고 있을까 궁금했는데, 대화는 깊게 안 나눠서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조계종 노동위원회 하시는 분이 계세요. 집행위원장인데 그분도 매일 자리를 지키고 계셨거든요. 성소수자들이 모여서 하는 건 분위기가 다르고 새롭대요. 너무 재밌다고, 노동자 집회는 재미가 없어… 이런 얘기하시고.(웃음) 사실 자리를 채워주는 거잖아요. 그게 농성에서는 되게 중요하거든요. 그런 분들이 되게 인상적이었고, 의례적인 게 아니라 이 운동이 잘 되게, 그리고 이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빠짐없이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어요. 지방에서 기차 타고 올라온 친구들도 기억에 남고요. 집에서 플랜카드 만들어서 가져오고.

사진출처: 친구사이
사진출처: 친구사이

메이데이 행사나 어딜가도 무지개 깃발은 있었잖아요. 그럼에도 왜 성소수자들이 다른 이슈에 연대해야하는가는 내부적으로 늘 논쟁거리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농성에 고무적이었던 지점은 늘 연대해왔던 지점에 계신 분들이 다시 연대를 표해준 것인데, 그런 방식으로 호응이 왔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분명히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 성소수자 운동 안에도 논쟁이 있고 이견도 존재하죠 . 연대가 우선순위가 아닌 곳들이 더 많을 것이고요. 연대를 계속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우리편이 되어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우리 이야기를 경청할 자세가 돼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차별이나 불의한 일을 겪고 맞서 싸워본 사람들, 그런 싸움에서 연대가 왜 필요한지 아는 사람들이어서, 우리가 겪는 차별과 불의와 억압에도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요. 그게 당장에는 품이 드는 일로 그칠지 모르겠지만, 디테일하게 살펴보면 그 과정 과정에서 변화나 관계를 쌓는 경험을 크게든 작게든 해 가는 거거든요. 그게 참여했던 사람만 느꼈던 거라면 이번 농성 같은 경우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내 편에 서는 사람들이 존재하는구나. 그런 게 중요하고 고맙구나.’ 이런 걸 느낀 계기가 된 것 같아 뿌듯해요. 모범적인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대라는 것은 당연히 관계의 문제라 일방적일 수 없는 것이고, 상호 이해와 연대의 의미에 대한 감각이 있지 않으면, 시혜라든가 원조와 다를 바 없어지잖아요. 그건 제가 생각하는 연대와 다른 문제고, 그래서 당연히 우릴 지지해주고 가장 먼저 달려와줄 거라 생각했고요. 농성 시작할 때부터 당장 물품이 필요한데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 연락해보자, 했죠. 관계가 이미 있기 때문에 도움 받을 수 있는 물품 있다는 거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쪽에서도 도와줄 수 있었던 거고요. 농성에 들어가고 나서 기대치 않았던 곳에서도 적극적으로 달려와준 경우들도 많아서, 성소수자 운동이 어쨌든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어요. 맺고 있는 관계의 폭 자체가 예전하고 다르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모든 사람의 삶이 법이나 제도와 밀접한 연관을 갖지만, 성소수자의 경우는 제도나 조례들이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례가 생기다 보니 아무래도 법-제도와 싸울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혹시 제도 내에서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삶과 존재, 인권, 권리를 법제화하는 부분을 항상 성소수자들이 먼저 요구하지는 않았어요. 차별금지법 논의 같은 것도 국가에서 주도했던 거예요.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다가 좌초된 건데, 거기서 거부 당하는 경험을 하면서 ‘우리 존재가 인정 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상징적으로 차별금지법이다’라고 생각한 거죠. 그 과정에서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허용법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오니까, 그게 왜 문제냐 이런 식의 논쟁이 벌어졌고요. 사람들이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성소수자 인권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게 됐고, “성소수자와 관련된 제도적인 문제로는 차별금지법이 있다”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성소수자에게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차별금지법 제정이 1위로 나와요.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헌장도 그렇지만 어떤 제도가 만들어져서 삶이 나아진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분명 현실과 제도의 간극이 존재하는 건데. 그럼에도 성소수자들이 기본적인 존재와 인권에 대해 인정하는 것조차 부정하는 목소리가 큰 상황이고, 성소수자들에게 뭘 ‘해줘야 한다’가 아니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에서 싸우는 수준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이것에 민감한 거예요. 물론 필요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감각도 높아져서 혼인 문제나 가족 구성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죠. 어쨌든 저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 선후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제도가 필요하다는 사회적인 여론의 획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장애인 운동에 비유하자면, 장애인에게 기본적인 생활권이 필요하다는 말에 “그게 왜 필요해?”라고 묻는 사람이 존재하는 건데, 필요하다는 애기를 계속해서 필요성을 알고 지지하게 만드는 과정이 있어야겠죠.

여론을 획득한다는 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바꿔 놓는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 우리가 뭘 할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사람들을 바꾸는 게 쉽지 않을 거라서. 소위 말해서 제도에 별로 관심 없는 숱한 사람들에게 성소수자들도 동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게 당연한 거라는 인식이 확대돼야겠죠. 그런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는 다양할 거라 생각해요. 인식 개선 캠페인을 할 수도 있겠지만, 헌장 문제같은 싸움이 벌어지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입장을 갖게 되는 상황이 필요하겠죠. 처음부터 입장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요.

제도 내에서 이루고 싶은 건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우리가 뭘 누릴 수 있는지, 뭘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을 때, “어떤 제도가 필요해요?”라고 물으면 당연히 할 말이 없을 거예요. 이를테면 10년 전만 해도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이동할 권리가 무슨 의미인지 장애인들도 몰랐을 거거든요? 그런 변화 같이 우리가 어떤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상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고요. 거기에 따라서 제도에서 이루어야 할 과제들은 계속 진화하고 변화할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어떤 목표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성소수자들이 온전히 자기 삶의 권리를 누리는 모습이 특정한 제도들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요.

 

예상치 못하게 박원순 시장이 사과를 하게 되면서 농성이 종료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농성을 종료할 때도 의견이 분분하지 않았나요?

그 과정이 되게 정신 없이 진행됐는데요. 박원순 시장 면담하고 나서 그 결과를 농성장에 있던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었던 거죠. 그런데 발언을 하신 분들 다수가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래서 농성을 계속하는 게 옳지 않겠냐는 입장이 많이 표현됐어요. 면담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느낀 감정과 농성장에 있던 사람들의 감정에 격차가 있었던 거에요. 농성장에서는 그건 대부분 사과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농성장에 있던 사람들은 박원순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근거로 삼는 건데, 만난 사람들은 현장의 분위기를 기준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고요. 기획단 사람들은 그 사이에서 정확히 전달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추후에 논의를 하고 판단을 했던 거죠. 그래서 어쨌든 이걸 사과로 규정하는 것은 맞다, 그러면 우리가 요구했던 네 가지 중에 그럼 면담과 사과는 이루어진 거다, 그럼 셋째 넷째 요구안에 대해 계속 싸울것이냐, 이런 것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어요. 거기서 고려한 것은 단지 사과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농성을 계속 지속했을 때 어떤 상황에 처할 것인가?’에요. 면담이 이루어지고 난 뒤의 국면은 그 전과 또 달라질 것이라는 의견들이 있었고, 농성을 지금 중단을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던 거죠. 그 판단을 다시 농성에 참여한 분들과 토론하고 설명하고자 했는데, 사실 그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하루만에 농성이 끝났고, 낮 시간에 농성장에 계신 분은 소수였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거죠. 그런 면에서 농성 기획단의 설명이 부족했다고, 판단이 배치된다고 생각하신 분들도 많았죠.

 

얘기를 듣다보니, 농성 조직 경험을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처음 하신 거라서 두려움이 컸을 것 같은데요. 닥치면 하게 되던가요?(웃음)

그렇죠. 닥치니까 하는 건데, 농성 경험이 없다는 것은 어떤 시점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시점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예측이 부정확하다는 거에요. 농성에 주요한 사항들을 결정하고 판단했던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하루 하루가 정말 예측과 다르게 진행되는 일이 벌어지니까… 들어갈 때는 바로 끌려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고, 그날은 안 끌려갔으니 월요일에 끌려 나가는 게 아닐까, 출근하기 전에 우리를 들어내면 어떡하나, 그런 우려를 했는데요. 돌아보면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뤄지는 건데, 서울시가 어떤 식으로 나올까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경험이 있었다면 그런 우려를 하면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는 농성을 잘 조직하는 일에 에너지를 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미숙함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수요일에 면담 요구를 받아들인 거에 대해서도 수요일 아침까지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라든지.

농성의 실무적인 부분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든요. 제일 중요한 건 밥이고요. 기본적인 것들이 해소가 안 되면 공간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최소한 밥을 먹고, 따뜻하게 있어야 되고, 이런 게 중요할 뿐이지 내용은 참여자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거라서. 다른 부분에서의 조직이 어려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 농성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까, 뭐가 필요하다고 할까, 이런 판단의 문제에 있어서의 우리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는 게 제일 많이 느꼈던 부분이에요.

 

경험이 전수되는 게 운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요. 농성이 종료됐고, 아쉬워하는 분들도 많았잖아요. 그런 아쉬움을 이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끝난 상황에서는 모두가 아쉬울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더 했으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거든요. 무지개행동에서도 공지를 했는데, 올해엔 혐오의 목소리들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행동이 좀 더 큰 규모로 여러 차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특정한 쟁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지난번과 분위기는 다를 수 있지만, 그런 기억을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행동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가 확대된 거라고 생각하고요.

아이다호 데이라고 불려지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기념해서 5월 16일에 행동이 있을 거예요. 성소수자 혐오 반대 행동을 규모 있게 해볼 생각이에요. 국제적으로도 캠페인, 집회, 행사가 다양하게 벌어지는 날인데 한국에서도 좀 더 큰 규모로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해서 아이다호 행동을 할 예정이에요. 퀴어문화축제도 성소수자들이 모여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연중 가장 큰 장이니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성소수자 인권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겠죠.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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