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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 숏221세기 들어 ‘공공성의 회복’은 각종 사회적 질병들의 진단과 처방을 도맡는 만병통치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상하다. 누구나 외치고 누군가 수행하고 있지만 누구도 그것이 작동하고 있는지 본 적이 없다. 사회를 가득 채운 공공성은 일종의 신화이자 텅 빈 공간이다.

공공성은 모호하다. 좁게는 통치나 정부의 동의어로 사용되며 공공기관의 공공재 관리와 관련된 일련의 행정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다수의 낯선이들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적영역 전반의 행위를 포괄한다. 그리하여 공동선의 추구라는 당위를 설득하기 위한 공적 결정의 순간들엔 정부도, 시민사회도, 심지어 시장 마저도 공공성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호명한다.

공공성의 문제는 어김없이 개인들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막상 합의와 참여라는 일련의 소통 과정에 들어서면, 이미 공공성은 ‘말’로 가득 차 발 디딜 틈 없고, ‘나’와 ‘당신’은 그곳으로 줄을 선 관중, 처방을 기다리는 환자로 전락한다. 정작 공공 안에 있어야 할 ‘나’들은 비어있다.

그리하여 공공성의 시장에서 나는 결국 ‘소비자’다. 사상과 이념이라는 선생님이, 언론과 기업이라는 사장님이 ‘맞춤형’으로 진열한 ‘공동의 목표’라는 상품들을 보며 구매를 고민할 뿐이다. 외주화는 생산과 소비를 넘어  선량한 ‘참여’, 소박한 ‘일상’ 마저 집어삼켰다. 바야흐로 ‘공공의 외주화’시대.

외주화된 공공을 삶으로 가득 채울 방법이 없을까. 공공성의 구호들에 가려 우리들의 문제는 존재하지만 정작 나의 문제는 없는 이 텅 빈 공공을 채워내야 한다. 많은 구호들이 개인주의와 소비자를 넘어서자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우리가 진짜 ’개인’이 되어 본 적은 있던 것일까. 텅 빈 공공 위에 서서 서로를 바라볼 참 ’개인’들을 발굴하고 보존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공공을 말하지만 개인을 향할 것이다.

– 생활 속의 자기 문제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문제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들.
– 취향의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하며 좋은 취향과 그것의 공유를 위해 xxx로 범주화되는 ’모욕’을 감수하는 이들.
– 보다 뚜렷해진 자신에서 시작되는 날선 소통들로 나와 당신을 이야기를 하는 이들 등등…

이들이 모여 ’공공성의 회복’ 이전에 ’공적 개인’이 되어 빈 공공을 채울 방법을 이야기할  것이다. 합의와 일치 이전에 좋은 차이로부터 시작되는 공공을, 당위보다는 실패한 대안들의 대안을, 존재하지 않을 공동체 대신 홀로선 공간에서의 공공을, 애설픈 생산자가 되기보다는 공적으로 향유 가능한 나름 좋은 취향을 가진 소비자가 되는 방법들을.

각자의 목소리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전환점이 이곳에서 시작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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