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운동’ 라운드테이블4 “Error: 뭔가 말해야 합니다 – 비평담론의 전환 도모” 녹취록

Chapter 3. 운동 : 라운드테이블4  “Error: 뭔가 말해야 합니다 – 비평담론의 전환 도모”

일시    2015년 3월 22일 일요일
장소    오피스커피
패널    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소영현(문학 평론가), 이용재(음식 평론가), 임근준(미술 평론가)
사회    백지원
사진    전소영

 

백지원  안녕하세요. 00그라운드 part3 비평 라운드테이블 ‘Error: 뭔가 말해야 합니다’ 사회를 맡은 백지원입니다. 의미값이 0에 수렴하는 말들의 공회전에서 비평을 구출하고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내자는 자못 거창한 의도에서 자리를 열게 되었습니다. 참석해주신 패널 분들과 관객 분들게 감사드리며 먼저 간략한 패널 소개와 근황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용재  안녕하세요. 음식평론가 이용재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일단 제 홈페이지에 음식 관련 글을 쓰고 있고요. 몇몇 매체에 관련 글을 또 쓰고 있고 근황을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2년 전에 “외식의 품격”이란 단행본을 냈는데요. 그 다음 속편을 올 후반기 출간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고요. 그 외에 옮기는 책 세 권정도 기획하고 있고요. 또 봄에는 모 대학 박사과정에서 전공과목을 하나 맡아서 가르치고 있고요. 주목할 만한 거라면 아마 최초로 제가 이 일을 하고 5년 정도 만에 본격적인 레스토랑 리뷰를 잡지에 이번호부터, 4월호부터 기고할 예정인 게 있겠고요.

임근준  저는 미술비평가인데요. 저는 미술‧디자인 비평가로 활동한 지 길게 보면 20년 정도 되는데요. 처음부터 지금까지 관심사로 갖고 있는 건 어쨌든 한국사회에서 당대성이라고 하는 게 어떻게 형성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이게 저한테는 가장 큰 대 주제, 연구 과제라고 볼 수가 있어요. 2008년을 기점으로 해서 시각성의 체제가 크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제가 평론가로서 목표로 삼고 있는 건 변화하는 체제를 어떻게 적절한 형식으로 담론화해서 새로운 국면을 뽑아서 비평적 상황을 도출하느냐 이게 저한텐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은 기본적으로 비평가니까 평론을 쓰는 게 기본적인 활동이겠지만 가장 가까운 미래에 기획하고 있는 일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는 이제 현재 새로이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이 끝나고 난 뒤의 상황, 좀비 모더니즘의 상황에 부응하는 비평서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지금 못 내고 있는데요. 올 상반기엔 어쨌든 출간이 될 예정이고요. 거기에 맞춰서 이제 지난 시대, 00년대 예술가들 답문 시리즈를 두산에서 진행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자료집으로 출간할 거예요. 두 가지 출간 계획이 가장 가까운 기획입니다. 그 외에 장기적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이따가 비평 관련해서 자세하게 하부문제를 얘기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용언  안녕하세요. 저는 김용언이라고 하고요. 사실 비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게 좀 민망한데, 2000년부터 주로 영화지에서 기자로 일을 했었고요. 중간에 사이에 장르문학을 다루는 최초의 월간지였던 <판타스틱>에서 일을 했었고 <판타스틱>이 문 닫은 다음에 <프레시안>에서 주말마다 나왔던 서평섹션 <프레시안북스>의 팀장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5월 말 경 창간호가 나올, 미스터리 소설 전문 잡지를 준비하고 있어요. 문학동네의 장르소설 임프린트로 잘 알고 계시는 엘릭시르라는 출판사에서 내게 될 거고요. 이름은 <미스테리아>라고 합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전문으로 다루며, 한국 작가들 작품과 그 외 작품들을 절반 정도로 채우고 나머지는 기사들로 채우게 될 그런 잡지, 격월간으로 나오게 될 잡지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소영현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평론하고 있는 소영현입니다. 제가 사실 대중 울렁증 같은 게 있어요. 글로는 제가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는데 말로는 잘 못하고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너무 당황스러워서 (웃음) 좀 멀리 차라리 강연은 괜찮은데 너무 이렇게 보시면 제가 말을 제대로 못해가지고 여러분이 흥미 있어 할 만 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두서없이 이야기하게 될 건데. 미리 잘 부탁드리고요. 이것저것 하고 있고요. 앞으로도 이것저것 할 계획이고 전공도 애초에는 원래는 여러분 되게 재미없어하실 1900년대 주변의 어떤 청년 주체 이런 거에 대해서 연구를 했었는데요. 그 이후론 도대체 뭐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된, 이것저것 뭐 문학, 영화, 만화, 웹툰까지는 아직 못했고요. 뭐 팬픽, 아무튼 이런 거 다 하고 있고요. 가장 최근에는 역사화하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서 비평에 대한 논의 혹은 비평이 뭐냐, 비평이 한국에서 어떻게 자리잡아왔느냐 연구하는 것과 문학, 문화 사이의 경계에 놓여있는 비평의 영역에 대한 문제제기도 계속 하고 있어요. 한편으로 계속 또 꾸준히 하는 작업 중에는 역사화작업 가운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창작과비평>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1966년에 한국에서 만들어졌고요. 그게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2월에 발표를 했었는데 한국에서 그런 비평적인 매체가 만들어지는 분야에 대해서 연구하는 작업을 계속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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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원  감사합니다. 저희가 여기서 논의해보려고 한 주제는 크게 세 가지인데요. 첫째는 비평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말씀 여쭤보고 싶었고 두 번째로는 비평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와 제도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근/현대적 개인’으로서 비평 작업을 하는 거에 대한 질문들을 패널 선생님들께 각각 드리고 싶었어요. 시간이 남으면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저희가 90분 동안 일단 패널 토론을 진행을 하고 남은 30분 동안은 플로어 질문으로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비평을 비평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우리가 흔히 비평가라는 말을 쓰지만 지면에 나오는 직함은 대개 평론가인데, 저는 ‘평론’이라는 말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비평의 ‘글’로서의 성격이라고 생각했어요. 따라서 평론가란 비평 작업을 글로써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가 궁금했습니다.

이용재  00그라운드에서 섭외 연락을 받고 이것이 굉장히 저의 작업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문학을 평론하시는 분도 있고, 미술이나 디자인을 평론하시는 분도 있고 이러한 측면에서 이미 평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 돼있거든요. 근데 음식에 대해서는 여태껏 과연 음식이 평론의 대상인가 하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음식 전반 문화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떤 태도라고 생각하거든요. 일단 저의 작업의 목표는 음식 평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제가 선택한 것이 표준적인 방법론이다 답변은 못하지만 접근 방식으로서 이러한 것이 존재한다, 라는 것을 글을 써서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 비평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자문을 한다면 저는 어떤 담론 자체의 존재와 가능성을 부각시키는 거, 한 마디로 음식을 대상으로 놓고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가, 그런 것이 1차적인 과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글쓰기에 대한 문제는 사실 저는 원래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이었는데요. 제 글쓰기, 한 마디로 프로덕션에 관한 태도는 그쪽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건축과의 프로그램에는 스튜디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실기죠. 일정 콘셉트나 테마를 놓고 건물을 디자인하는 수업인데요. 항상 프로덕션 자체를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생각을 말로써만 표현하는 것에 대한 말의 휘발성, 이런 것들에 대한 경계랄까요. 교수와 1대1로 수업을 한다거나 그러면 말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모델이랄지, 도면이랄지, 이런 것들을 만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항상 교육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결과 비슷한 시각에서 글에 접근을 해요. 항상 특정한 현상, 특정 음식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글로 표현하지 않았을 때 완성이 안 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생각하는 그 자체도 있지만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일종의 문제 해결과 지시점의 결정과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제 홈페이지에 자유롭게 쓰는 글에서도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지만 원고료를 받고 매체에서 글을 쓰는 입장이라면 항상 톤의 매너를 지켜야 하고요. 지면에 굉장히 한정된 것은 이런 것들 속에서 어떻게 내가 하나의 주제를 놓고서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것인가. 많은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하거든요. 하다못해 단락의 크기까지. 예를 들어서 원고지 열 매 분의 글을 쓰는데 과연 이것을 지면에 실었을 때 다섯 줄짜리 문단이 몇 개쯤 오면 글을 읽기에 시각적으로 보기가 좋을 것인가. 이러한 모든 과정이 본질적으로 글을 통해 다뤄야 할 주제와 대상과 함께 일종의 시너지 현상을 일으킨다고 생각합니다.

임근준  비평의 사회적인 용도가 뭐냐고 하면 글쎄요, 뭐 답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어쨌든 평론이라고 하는 거는 하나의 예술작품이건 혹은 예술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이 어떤 특정한 필요에 따라서 만든 물건들에 인간의 정념이 깃드는 거잖아요. 그게 음식 비평이건 음악 비평이건 디자인이건 미술이건 기본적으로 모든 비평의 기본 단위로 볼 수 있는 게 사물이나 대상에 어떤 정념이 깃들어 있느냐, 라는 것이겠죠. 그리고 비평가의 역할이라고 하면 정념이 사물에 깃드는 방식의 어떤 시대적인 추동, 동력이라는 게 있고, 그것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문제적인 지점이 있는데 그것을 가시화하고 담론화해서 어떤 동세, 새로운 동세를 창출하는 게 비평가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우리 시대에 예술이 처해있는 차원 중 시각성 차원에서 가장 문제적인 차원을 찾고 그것을 담론적으로 가시화해서 어떤 동세, 긍정적인 동세를 만들어내는 게 언제나 저는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답변 드리면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용언  저는 여태까지, 평론을 직접 썼다기보다는 평론가들에게 글을 청탁을 하고 그것을 싣는 것을 주로 했던 입장인데요. 되게 오래된 얘기들이 있잖아요. ‘평론가는 실패한 창작자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은 도저히 찬성할 수 없는, 굉장히 얄팍한 얘기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비평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이거든요. 이게 작품이 있고서 비평이 있다는 면 때문에 굉장히 종속적인, 일종의 주종관계처럼 보는 일차원적인 시선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물론 새로운 세계를 구축을 하고 창작을 했다는 것 자체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문제는 그 작품이 좋으냐 아니냐를 따져야 되는 거잖아요. 이를테면 순문학과 SF와 미스터리와 판타지 사이에 위계 관계가 있다고 보고 어떤 것을 되게 하류 취급을 하는 그런 시선들이 있는데, 잘 쓴 소설과 못 쓴 소설이 있을 뿐이지, 장르가 다르다는 이유로 평가 절하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처럼 평론 역시도 좋은 평론과 나쁜 평론이 있는 거고 저는 그 좋은 평론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평론가라는 게 굉장히 종속적인 위치라는 얘기는 잊어버리고, 창작자가 만들어놓은 어떤 작품을 정말 잘 읽어내고 얘기할 수 있는 좋은 평론이 있느냐를 찾는 게 우리한텐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 창작자가, 본인이 작품 속에 숨겨놨을, 그것을 드러내기는 싫기 때문에 잘 꽁꽁 숨겨놨을 어떤 의미, 혹은 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영향 받았던 무언가가 그 작품 안에 창작자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가 있을 때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게 좋은 평론이죠.

어떻게 보면 평론가는 창작자보다 더 깊은 시선, 더 조망할 수 있고 더 깊게 멀리 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왜냐면 창작자는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온 정성을 기울이지만 비평가는 거기서 또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그 작품과 그 작품을 둘러싼 세계까지 더 넓게 일별한 다음 그것을 글로써 혹은 뭐 어떨 때는 강연이라는 말의 형태로써 다시 한 번 완결을 지어야 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힘든 작업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창작자다, 라고 했을 때 그 작품을 누구도 봐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고 읽힐 수 있고 얘기될 수 있게끔 연결지어주는 사람이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에, 평론이 글 혹은 말로써 완결이 됐을 때 비로소 그 작품조차도 완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자 본인이 자족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작품을 아무도 보지 않아도 상관없겠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나의 작품을 가지고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그 작품에 대해 평가를 해주고 좋은 평론을 해주고 자리매김을 해줬을 때 비로소 그 작품을 둘러싼 하나의 세계가 완성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소영현  네. 그냥 제가 비평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비평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질문하시는 것 같은데, 일단 전 기본적으로는 비평의 2차성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텍스트를 읽는 건데 물론 비평의 본래적인 정의라는 게 뭐뭐에 대한 사유, 혹은 글쓰기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뭐뭐에 대한이라고 하는 게 뭐뭐 안에는 뭐든지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 건축, 미술 등등 그런데 뭐뭐에 들어가는 텍스트라고 할 때 땡땡을 읽는 거지만 사실은 땡땡 너머에 땡땡화된 현실을 읽는 거겠죠. 그게 사회든 현실이든, 저는 비평이 결국은 사회를 읽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텍스트화된, 뭐라 그러나요. 프리즘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거를 통해서 사회를 읽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비평의 사회적 기능은 어떻게 보면 저는 불필요한 질문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제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비평 작업은 세 가지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이거는 제가 항상 생각하는 건데 하나는 문학사가로서의 비평의 작업, 하나는 문학이론가로서의 비평의 작업, 하나는 서평가로서의 비평의 작업인 것 같아요. 원래 무언가를 판단하려면 어떤 맥락 속에 있어야 판단이 가능한 거니까 얘 자체로는 얘가 의미가 있냐 없느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거고, 맥락이 보여야 되는 건데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찾는 것은 문학사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데 문학 이론은 이런 거죠. 1960년대에는 신춘문예에서 시조를 공모했었거든요. 시조 같은 거는 조선시대 후기에나 썼을 것 같지만 계속 읽었어요. 계속 썼어요. 이게 되게 신기한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문학이라는 범주 안에 시조가 들어가 있었다는 거예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문학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그런 걸 보았을 때 문학이 뭐냐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필요한 건데 문학 이론 작업이라는 게 그런 거란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여태까지 영화 같은 경우는 문학이 아니었죠. 당연히 아니었고 문학 연구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연구하면 그건 문학 연구가 아니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문학 연구하는 학과에서 영화, 만화, 심지어 이런 것들을 박사논문 석사논문으로 써요. 문학의 범주가 완전히 바뀐 거죠. 끊임없이 문학이 뭐냐, 이 범주의 경계가 제대로 된 거냐, 질문하는 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어떠한 관념과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이념상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게 일치하느냐,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지는 거가 문학이론작업이고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를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되니까 그런 작업 세 개를 요약하자면 제가 하는 비평 작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백지원  소영현 선생님께서는 비평의 2차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비평이라는 것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텍스트에 표현된 사회를 비평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평론가는 전문가이거나 지식인으로서 활약을 한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분야의 지식을 체계화하는 이론가로서의 작업이 있고, 또 선별을 해서 서평을 하는 해설자로서의 작업이 있을 테고 그리고 또 특정 분야 대표로서 발언권을 갖고 사회 전체에 대한 평론을, 논평을 내놓는 역할도 가끔 기대가 되지 않나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평론가는 어떤 자신의 전문 분야, 해당 분야와 얼마나 밀착해서 활동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소영현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비평이라고 얘기를 많이 하지만 비평이라는 말이 일상화된 거는 문학비평으로서의 비평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들이 비평이라면 떠올리는 건 일반적으로 문학비평일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이것도 원래 오래 전부터 비평하면 문학비평이었던 게 아니고 1970년대부터 만들어진 거거든요.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밥 먹으면서 그냥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중에 드라마가 굉장히 많잖아요. 한국을 강타하고 있는 거는 드라마의 힘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식탁에서 밥 먹으면서 지식인들도 드라마를 얘기하는 거에 대해서 조금의 부끄러움이 없는, 너무나 당연한 시대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좀 상상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조금 더 전 시기로만 돌아가도 드라마를 지식인이 얘기하는 건 되게 부끄럽게 여겼던, 실제론 집에 가서 다 보시면서 나와서는 전혀 안 보는 척 하는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이제 드라마 시대가 온 거예요. 그런 것처럼 90년대는 영화의 시대였다고 얘기할 수 있고 70년대는 문학의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거든요. 70년대, 80년대만 해도 이상문학상이 1년에 한 번씩 상을 주고 선집 같은 걸 내면 모든 대학생들이 그걸 사서 보는 거예요. 보진 않죠. 그냥 사서 꽂아 놓겠죠. 그런데 너 이번에 샀니? 너 이번에 그 작품 읽어봤니? 이런 대화를 던진다는 거죠. ‘내가 교양 좀 있어’라고 말할 때에는 그런 걸 사서 얘기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다 무너졌어요. 문학이 교양의 대표였던 시절에 문학비평이 곧 비평이었던 시절도 있었던 거고, 그런 담론이 만들어진 게 1970년대라고 생각이 들어요. 죄송한데 질문이 뭐였죠?

백지원  평론가가 하는 일이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할까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논평을 내놓는 게 더 중요할까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소영현  그게 통합됐던 시기가 1970년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일반적으로 비평 작업을 하던 사람들과 문학 내부로 진입해서 문학비평을 하던 사람들 사이의 경계가 희미했던 그 당시의 비평가를 비평가지식인이라고 표현을 해요. 여러분 잘 아시는 백낙청 선생님은 그냥 문학비평가는 아니잖아요. 지식인이죠. 사회에 대한 어떤 얘기도 하시는 분들인데 그런 역할과 위치가 만들어졌던 건 1970년대이고, 그 시기만 해도 지식인과 문학비평가가 겹치는 자리에 놓여있었는데 그게 서서히 분화되기 시작하죠. 왜 그러냐 하면 비평이라는 게 굉장히 불안정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시조가 문학 안에 들어갔었지만 비평은 문학이 아니었거든요. 비평은 그냥 별도예요. 아까 김용언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치 문학하려다 실패한 사람들이 비평하는 것 같은 그런 담론이 있었고 문학 범주 안에 비평은 안 들어갔던 거예요.

그런데 그런 비평의 위상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 만들어지면서 비평이 문학 범주 안으로는 들어갔어요. 안정성을 획득을 했죠. 그런 반면에 비평 작업이 문학으로 축소됐다고 저는 생각해요. 사회 전반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게 아니라 문학에 대해서만 논의를 하는 거죠. 예전에는 문학과 비평이 공존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1970년대부터 문학의 하위범주로 비평이 들어가서 마치 비평은 문학비평, 문학 안에 있는 좁은 하위범주 중에 하나인 것처럼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그걸 기점으로 보니까 이전에 굉장히 불안했었지만 의미 있는 작업이었던 비평의 작업이 안정됐지만 영역이 축소된 그런 시기로 넘어간 것 같아서 이거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1970년대를 계속 얘기하고 있는 거고요. 비평의 기본이 그렇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문학과 비평 사이에 교집합뿐 아니라 빈 곳이 있다, 그 빈 곳을 되살리는 게 비평을 회복시키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게 적절한 답변인지는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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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  제가 추가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우리나라에서 대사회적으로 비평가가 지식인으로서 커다란 거대담론에 대해서 발언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일본을 통해서 평론을 이해했기 때문에 비평가의 역할에 두 가지 영향이 겹쳐져 있다고 생각해볼 수가 있어요. 하나는 일본에서는 효론가(評論家, ひょうろんか)라고 하잖아요. 평론가들이 거의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할 수 있죠. 그게 서양하고 좀 다른 측면이 있거든요. 보면 번역문학가셨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George Seidensticker)도 일본 지식인사회에서 효론가로 활동을 하면서 여기에 대한 발언을 아주 자주 하셨거든요. 특정 분야의 비평가들이 자기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서 발언력을 행사하는 것은 일본의 특징이다, 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게 보면 일본 식민기 때부터 우리가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사실은, 지금 70년대 말씀을 강조를 많이 해주셨지만 이미 일본 식민기 때나 해방 이후의 1950년대의 상황에서도 우리나라의 지식인들, 비평가들이 사회전반의 문제에 대해서 발언력을 행사한 예가 있죠. 그거는 절대적으로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거라고 볼 수가 있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자꾸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가 하면 원래 비평가라고 하면 어쨌든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작품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라고 하는 게 있고 그게 자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 작품이 물화되는 과정 이 앞의 단계에 대해서 원래 비평이 이야기를 해왔죠.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중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만들어지면서 작품이 사회에 소통되는 방식, 소비자와의 관계에 더 방점이 놓이게 되면서 비평가들이 이제 문화비평으로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된 거죠. 이 커다란 변환의 과정에서 역시 비평가들이 대사회적인 발언력을 크게 행사하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효론가로서의 대사회적 발언력과 197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대중비평가로서의 역할은 사실 좀 달랐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인 귀족 계급의 자제들이 집안 말아먹으면서 예술가도 포기하고 실패한 예술가로서 이제 비평가가 되어서 대사회적으로 전반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시대가 있는 거고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1970년대 후반에 이제 <뿌리깊은 나무>가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뿌리깊은 나무>에서 서구식 에디터십을 발휘해서 비평가를 길러내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예술사회학적 입장을 갖고 있는 필자들을 길러내는 거죠.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민중미술의 비평가들이 원래 <뿌리깊은 나무>에서 익명 비평으로 칼럼을 쓰면서 주류 미술계를 공격을 하다가 인기를 끌자 나중에 실명을 공개하면서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데 그 대표가 성완경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역사는 좀 구분해서 놓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보면 우리 한국현대미술계를 보더라도 이미 비평가의 역할은 초기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했어요. 예를 들면 오세창 선생님이 미술품을 수집하는 수집가로서의 자기 위상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의 미술품들을 모아서 화첩을 만들고 거기에 대해서 이제 논평을 붙여서 초기적인 비평을 시도하는 게 <근역서화진>이라는 책이 있고요. 근역이 이제 무궁화동산이라고 해서 조선을 뜻하는 거겠죠. 근데 그 당시에는 우리가 독립국이 아니었으니까 우회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그리고 이미 1950년대에 4.19를 기점으로 달려 나가게 되는 앙포르멜 미술 운동에서도 리더 역할을 한 거는 작가들도 있었지만 박서보 선생님과 함께 앙포르멜 미술운동을 견인했던 인물이 방근택이라고 하는, 지금은 잊힌 미술비평가입니다. 그리고 195,60년대, 그리고 70년대까지도 주요 일간지에 지면에 미술비평가들이 직접 아주 어려운 글을 썼어요. 지금 읽어도 이런 게 어떻게 일간지에 실렸을까 싶은 글들이 비평으로 실렸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1970년대 후반에 대중 비평으로서의 전환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본격적인 비평들, 문학비평, 미술비평, 음악비평이 일간지에 실려서 일간지가 사실 요즘 일간지와 다른 거죠. 지식 계층이 읽는 매체였기 때문에 보면 1970년대 이전에도 사실은 대사회적으로 볼 때에 비평이 상당한 권력을 누렸던 시절이 존재합니다. 근데 이제 70년대에 어떤 변환이 존재했고 그것이 우리나라에선 <뿌리깊은 나무>로 대변되는 어떠한 미디어환경의 변화와 맞물려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대사회적 발언력이라고 하는 것도 저는 둘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적으로 효론가로서의 대사회적 발언력, 귀족 자제로서 지식인으로서 사회를 이끄는 인물들의 발언력과 그 이후에 등장한 교육을 통해서 계급상승을 이룩한 대중문화비평가로서의 비평가들의 사회적 발언력 두 개는 상당히 질이 다른 거라고 생각을 해요. 예를 들면 <뿌리깊은 나무>에서 대사회적 발언력을 획득했던 비평가들의 대표라고 하면 처음으로는 총리까지 했던 우리 한완상 선생님, 젊은이로 꼽자면 마광수 선생님 정도가 1세대라고 볼 수가 있겠죠.

소영현  아, 네. 많이 배웠고요. 저는 문학 비평의 차원에서 말씀을 드린 건데 미술 비평의 경우에는 그랬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일단 다른 거에 대해서는 제가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재미있게 생각하고 좀 공부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식민지시기 한국사회에 어떤 대사회적인 발언을 했던 비평가가 그렇게 많았나 의심스러워요. 두 가지만 좀 제가 궁금하고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는 거는, 하나는 뭐냐면 이런 비평가‧평론가라는 게 일본으로부터 온 거다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서양에서도 저는 대사회적인 발언을 했던 비평가들은 많이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여전히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거는 오히려 비평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인문학의 문제로 접근할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요. 인문학이 완전히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벌어진 비평의 전문성이 야기한 문제이기 때문에 인문학적인 차원에서 대사회적으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서양에서도 많이 있죠. 그게 일본에서 온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약간 의구심이 들고요.

한 가지는 말씀드린 것처럼 1970년대 이전에 그런 게 뚜렷하게 형성되었다가 이전에는 분명히, 딴 건 잘 모르겠고요. 문학의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핵심은 창작이었고 비평가가 단 한 번도 장을 꾸려본 적은 없거든요. 그리고 문학평론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출신이 유명한 평론가들이 몇 사람 있어요. 창작을 겸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고요. 창작을 안 한 사람 중에는 여러분 잘 모르시는 유원조, 최재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런 사람들은 영문학 전공자고 경성제대 출신이에요. 그러니까 일본어 공부하고 일본적인 지식을 많이 배웠기 때문에 한국 문학에 대해서 뭔가 언급하고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문학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전에 비평가가 그렇게 영향력을 발휘한 적은 거의 없었고 대사회적인 발언은 당연히 안 했고 이거에 대해서는 제가, 문학 범주 너머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시각이 있구나, 라는 것을.

백지원  두 분 선생님들께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사실 지금 현재 상황에서 저희가 보기에는 미술이라든가 문학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평론가가 생산 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보이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문학 평론가 같은 경우에는 소설가나 시인이 등단할 때 심사를 하고 또 어떤 담론으로서 그 장 안에서 영향을 직접 미치기도 하고 미술평론가 같은 경우에도 큐레이터와 작가와 협업을 해서 전시를 기획한다든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야 될 작업의 방향을 제시한다든가 이런 역할들을 많이 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산양식에 개입하는 게 조금 제도화가 덜 된 분야에서의 비평도 있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거에 대해서 이용재 선생님이나 김용언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평론을 하면서 어떤 독자를 주로 대상 독자로 생각을 하시고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어떤 효과를 미치기를 원하시는지 그런 것들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용재  사실 제가 2년 전에 처음 단행본을 쓸 때 잠깐 슬럼프가 있었습니다. 과연 어떤 책을 쓸지, 주제라든지 소재 같은 것들은 명확하게 잡아놨는데 톤의 매너 같은 것에 대한 정확한 기조를 못 가지고 있던 때가 있어서. 담당 편집자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독자를 상정을 해봐라. 어떤 사람이 이 책을 읽기를 원하는가. 그 대답을 찾으면 과정이 좀 쉬워질 것이다. 결국은 그 슬럼프를 넘어서서 책을 썼습니다만 솔직히 누군가가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주제나 소재를 어떻게 최선으로 엮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면 과연 이 책을 내놓으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 책을 어떤 사람이 읽을 것인가, 서울시 강서구에 다니는 20대 남성이 읽을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생각을 전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결론을 못 내렸고요. 또한 그러한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음식에 대한 담론의 생산자로서 저는 그냥 개인의 목소리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내가 누군가를 대표하는가, 내가 어떠한 단체를 대표하거나 어떠한 씬을 대표한다거나 아니면 제가 여러 가지 창구를 통해서 쓰는 글이 어떠한 특정 집단에 영향을 미칠 것을 미리 기획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사실 못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어떻게 보면 저는 효과적인 생산에 대한 생각에 좀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다고 할까요. 개인으로서 제가 만들어낸 담론이 개인에게 가는 것. 그것이 집단을 겨냥한 것, 한국 20대 중 음식에 관심 있는 남자, 여자, 이런 식이 아니라 어떤 개인에게 갈 수 있는.

백지원  예를 들자면 음식을 만드는 생산자에게 주로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시는지 아니면 소비자들이 먼저 이것을 볼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이용재  그 생각을 전혀 사실 못하고요. 그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왜냐면 저는 사실 제가 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런 말씀 하시는데, 저는 한편으로는 거리를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만들어내는 어떤 대상과의 거리? 독자와의 거리도 중요하고요. 음식 같은 경우는 생산자와의 거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감정적인 측면에서의, 예를 들어서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지만 그것이 감정이나 감성적인 부분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거는 어떻게 보면 선동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글이 어떤 누군가에게 특정한 역할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의식적으로 하지도 않고 또 생각을 하려도 할 수 없어지는, 여기까지 얘기할까요.

김용언  아까 나왔던 얘기랑 좀 맞물려서 지금 두 번째 질문까지 얘기를 하자면요. 다른 분야는 제가 잘 모르니까 일단 영화 비평을 예로 들게요. 저는 일단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식인이 아니라 전문가가 먼저 필요하고. 근데 그게 그 전문가가 나오기 위해서는 역사가 확정이 되어야 하는 거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나올 수는 없는 거예요. 뭐든지. 작품도 평론도. 이를테면 지금 어떤 작품이 무척 뛰어나고 남다르다는 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거꾸로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가 정말 질적으로 전환을 했던 폭발적인 르네상스의 진행 과정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봐요. 당시 그런 작품들이 나오면서 산업이 폭발하고 매체들도 우후죽순 생겨났는데, 그 매체들이 기존의 방화와 이 영화들이 어떻게 다르고 뛰어난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다보면, 이 영화 주변의 계보를 작성해야 할 필요가 생기고, 또 그러다보면 60년대 70년대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작품들이 있다는 걸 캐치하고 그 영향 관계를 독자들한테 전파하면서 영화제가 생기죠. 거기서 다시 한국 과거의 영화들의 회고전을 틀고 새롭게 그 영화들을 보게 된 관객들 사이에서 담론이 형성되고. 이 모든 것들이 맞물리면서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봐주고, 정확하게 과거의 유산과 현재진행형의 무언가를 연결시킬 줄 아는 전문가가 필요한 건데, 특히 성장이 어떤 임계점에 달해 평평하게 가거나 서서히 쪼그라드는 상황이 왔을 때 명백하게 평론가의 위치가 도드라지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정말 다 맞물리는 건데 작품들도 앙상해지고 평론들도 앙상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체들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되게 앙상해질 수밖에 없는 거고. 소비자와의 피드백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업적인 상황에서 더 이상 전문적인 얘기하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죠. 아, 재미없다고, 무슨 그렇게 고리짝 같은 얘기 하냐는 태도가 대세가 된다면, 아무래도 독자들, 관객들, 소비자들에게 좀 매달리는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것저것 끌어들여서 쉽게 편하게 재미있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해설로서의 글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두 번째 질문까지 끌고 오자면 어떤 독자들이 필요한가, 작품을 실제로 보고 듣고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게 필요한가라고 했을 때는 역시나 쌓아온 역사가 존재함으로써 감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말, 눈이 밝은 사람을 원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지금 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면 미스터리 소설 마니아가 1차적인 독자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냥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사람이 독자라고 상정을 하고 있거든요. 소설을 읽을 때 무엇이 재밌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순문학이 아니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전혀 구애받지 않아요. 한국소설이냐 일본소설이냐 서양소설이냐에 대해서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재미를 찾기 위해 되게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독자들을 이제 찾아보고 싶은 거죠. 한국 미스터리 소설계의 붐업을 시키기 위해서. 정말 지금 작은 수준인데, 이거를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되는 거고 정말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야 되는 거고, 물론 여러 책들 사이에서 오가는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독자들을 찾고 있는 거예요.

임근준  아까 김용언 선생님께서 비평가가 실패한 창작자가 아니다라고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저는 뭐 반농담 반진담으로 말씀드리면, 훌륭한 비평가는 대부분 실패한 창작자죠. (객석 웃음) 훌륭하게 실패한 사람이 훌륭한 비평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솔직히 비평가들이 원래는 자기 분야에서 창작을 하다가 이 그지 같은 거 도저히 못해먹겠다 생각하고 때려치우고 나라도 비평을 해야겠다 해서 비평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죠. 특히 비평가에게 많이 도움이 되는 정신적인 태도가 말년성의 정신태도라고 볼 수가 있는데, 말년성이라는 게 꼭 늙어서 은퇴하고 난 뒤에, 다 이루고 난 뒤에 내가 이룩한 걸 다 무너뜨려야지 하는 말년성도 있지만 일찌감치 말년성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실패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결국은 특별한 성찰력을 확보해주는 말년성을 확보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게 역시 비평가들한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이용재 선생님도 건축 그만두시고 음식을 하시기 때문에 사실 비평을 더 잘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어쨌든 각 분야나 혹은 장르마다 친연관계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자기만의 위치라고 하는 게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발생하는 남들은 조망할 수 없는 특별한 위치에서의 퍼스펙티브가 나오기 때문에 그게 비평가한테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사실은 원래 학부 때 전공이 디자이너였고 그리고 90년대 중후반에는 계속해서 작가 겸 디자이너로 활동을 하다가 이제 비평은 겸직을 하다가 2000년 넘어오고 나서부터 비평 쪽만 하고 창작은 그만두게 되면서 전업 필자가 되었습니다만 그게 어쨌든 그런 전사들, 흑역사가 쌓여서 특별한 비평적인 성찰력을 확보해주는 경향이 저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서, 비평가가 실패한 창작자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저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객석 웃음)

그리고 이제 비평가가 전문성을 띠는 게 더 중요하느냐, 아니면 제너럴리스트로서 일반적인 평론가, 대사회적인 발언권을 갖는 평론가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냐, 그리고 창작자와 밀접한 관계가 중요하냐, 이거는 답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각 분야를 막론하고 평론이 처해있는 문제를 보자면, 이제 대부분 젊은 세대에서 평론가들이 잘 안 나오는 경향, 그리고 평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기존의 다문화적 얼개에 두드려맞춰서 글을 써내는 일종의 거의 ‘봇(bot)’에 가까운 역할들을 하고 있는 이런 모습이 왜 나왔느냐를 이야기를 좀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90년대에, 우리나라는 좀 늦었지만 어쨌든 문화이론이라고 하는 포스트모던 방법론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서, 예를 들면 우리 미술 동네에서는 정통적인 미술사 중심이 아니라 미술 이론, 메타차원에서 담론 분석을 하는 연구들, 신미술사학이라고 하는 것, 신미술비평이 들어오게 되고 그에 따라서 이제 보면 한때 이게 아주 크게 발전했던 시기가 있죠. 그리고 나서 학회가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 세대, 2세대에 공부하는 학생들은 석박사 논문을 쓰고 학회를 춘하추동으로 돌아야 되니까 작가들과 만날 틈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기존의 포스트모던 담론에 맞추어서 논문을 써내고 계속해서 활동하는 것이 그 자체로 아트가 돼버리다 보니까 또 거기 끼지 않으면 절대 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고 혹은 연구원이 되고 업계 내에서 생존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작가들과의 접면이 점점 좁아지게 되는 거죠. 그러면 창작 과정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지고 글을 써내면 아무래도 포스트모던 1세대들이 갖고 있던 특별한 필력, 직관력에 비해서 굉장히 질이 떨어지는,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글들이 생산되는 게 악순환의 구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대표적으로 이 병폐가 심하게 드러난 부분이 영화비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화비평은 우리나라에서 운동권들이 입봉을 해서 영화를 일구지 않았습니까. 부산영화제와 맞물려서. 그때 1세대 비평가들은 사실은 정식적으로 영화 평론을 공부한 분들이 아니었죠. 다 여기저기서 다른 전공을 하고 영화계에 들어온 운동권들이 그 역할을 맡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정식으로 학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하고 해외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신 분들이 한국사회에서 비평가로 발언권을 행사하면서 작가들과 함께, 영화감독들과 함께 필드에서 뭔가 해보고자 했을 때 윗세대, 전대 운동권 선생님들이 잘근 밟으시죠. 그러기 때문에 자리가 나오지 않으니까 대부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다시 해외로 나가서 근대 초기 일본과 관련해서 동아시아 무빙 이미지 연구 쪽으로 도망치게 되는, 똑똑한 평자들이 필드에서 뛰지 못하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 말대답하지 않는 근대 초기 연구로 도망치게 되는 악순환이 있는데 사실 영화계뿐만 아니라 미술계도 비슷합니다. 9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똑똑한 이론가들 가운데에서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현장비평가로 활동하는 분들이 거의 없고, 해외에서 펠로우십 받아가지고 계속해서 근대 초기 이미지 연구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죠.

그래서 이게 정답이 있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현재 한국 사회의 상황에서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 방법론에 매몰되어서 논문을 생산하고 평문을 생산하는 봇 역할을 하는 악순환의 구조는 끊고 다시 작가들과 접면을 좀 넓혀서 실질적으로 과거에 좀 무식했던 초기의 비평 양식으로 작가와 비평가가 함께 이인삼각하듯이 뛰는 시대가 저는 지금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게 단점도 있습니다. 비평가의 생명력이 굉장히 짧아지거든요. 대표적인 케이스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라고 할 수 있는데요. 사실 니콜라 부리오가 관계 미학을 내세우고 운동권서적처럼 현황 파악을 해서 문건 형식으로, 팜플렛 형식의 책을 내서 자기 입장을 내세웠을 때 본인도 알았을 겁니다. 자기 생명력이 굉장히 짧아질 거라는 걸. 그래서 보면 98년도부터 비평을 하기 시작했고 2008년도에 관계미학이 완전히 파산을 했으니까 딱 10년 살고 인생이 끝난 셈이니까 굉장히 억울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보면 뭐 환쟁이들도 그렇고 전성기가 보통 길면 10년 짧으면 6,7년이니까 비평가들도 보면 사실 뭐랄까요. 내 몸이 불쏘시개가 되는 걸 감수하고 정확하게 자기 입장을 표명하면서 예술가들과 함께 어떤 특정한 판단유예의 공간을 만드는 그런 좀 뭐랄까요. 자기 몸 아끼지 않는 비평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과거 구세대들이 했던 역할모델, 학교에 끼어들어갖고 논문을 발표하고 한 바퀴 돌고 강사생활 몇 년 하다가 지방대 교수돼갖고 교수가 된 다음에 제자 괴롭히면서 제자에게 나의 비평적 얼개를 강조해서 내 논문을 밑의 애들 통해서 확장하는 이런 악순환의 다스베이더 같은 세계관은 더 이상 통하지 않거든요. 그러면 이제 새로이 비평가의 사회적 역할을 재창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결국은 비평가가 있을 자리는 저는 현장이라고 생각을 하는, 올드 스쿨 생각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지원  이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없으신가요? 비평가의 자리는 현장이다. 사실 문학비평 쪽에서는 현장비평이라는 말을 좀 깊이가 없고 하나의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평가라든가 해설만을 제공한다는 의미로 많이 써왔던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 평론가는 대학에 학제가 개설된 영역에서 학위를 받고 강의 혹은 연구 활동을 겸업하는 평론가와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 자기의 입지를 개척해가는 평론가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후자의 방법론을 제시를 하신다면 과연 이 청년세대의 평론가들이 어떤 식으로 지면을 뚫고 자기의 글과 자기의 담론을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 방법에 대해서, 물론 여기 계신 분들은 시대적으로 그때와 지금이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의 경험을 지금에 적용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시겠지만 과거 경험은 어떠했는지 혹은 현재 상황에서 평론가들이 데뷔를 하고 활동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그거에 관해서 조금 의견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용재  뭐 제가 그런 데 의견을 보태자면 사실 저는 상대적으로 이 일을 한 기간이 굉장히 짧고요. 제가 글 써서 밥 벌어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지가 만 5년밖에 안 됐고요. 실제로 굉장히 짧습니다. 그런데 뭐랄까 저는 다른 방법론을 택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음식을 평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새롭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런 부분도 있고요. 또 한편으로는 어떤 매체를 선택할 것인가. 비교적 요즘에 나타난 매체라면 블로그라고 할 수 있겠죠. 저 같은 경우는 거기에 그냥 습관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축적이 되고 일종의 셀프 트레이닝이 되고 그러다보니까 이제 그것이 나중에 어느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서 저한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비교적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역할이나 속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굉장히 다르죠. 다른 평론 분야에서는 일종의 제도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신춘문예 같은 데 평론 부문이 존재하고 문학상에 평론 부문이 존재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있지만 물론 그러한 쪽을 통해서 소위 말하는 등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제도적인 데뷔를 거치시는 분들도 있지만 현재는 다른 가능성들도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임근준  미디어가 어쨌든 환경이 변했으니까요. 지금 우리 시대의 평론가들이 옛날처럼 무슨 어디 특별한 시상제도를 통해서 입봉을, 등단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뭐 저는 사실 블로그가 굉장히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블로그의 시대가 지났다고 말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이 쌓이고 그게 어느 정도 아카이브 기능을 하면 그 필자의 색깔이나 능력이나 혹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비평적인 시각이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특별한 지면을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되는 바가 있고요. 그리고 일단 비평가로 어느 정도 알려지고 난 뒤에도 본인의 책, 논문, 일간지, 월간지, 블로그가 저는 하나의 컨티넘(continuum)이라고 생각해요. 연속체라고. 서로 각각의 지면에 색깔이 다른 글들이 실리게 되겠지만 그래서 그거의 비례가 잘 맞으면서 하나로 뭉쳐있을 때 결국은 비평가로 활동하는 그 사람의 시각이 도드라져 보이는 거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아날로그 책과 기타 인터넷에 존재하는 다양한 기무처들과 본인의 블로그가 하나로 합쳐져서 서로 상생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 자체 그게 비평가한테 상당히 필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시대의 비평가들이 옛날 방식대로 학교에서 특별한 전공을 하고 학교에서 논문 발표하고 혹은 어디에서 상을 타가지고 등단을 하는 거 말고 다른 방향이 뭐가 있는가 생각을 하면 저는 지금 어쨌든 다종다양한 독립잡지들이 등장하고 있으니까 비평가를 희망하거나 혹은 내가 비평가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라고 하면 당연히 그런 특별한 동인활동이나 독립잡지를 만드는 걸 본인이 주도해서 특별한 미디어와 아니면 본인과 뜻을 같이 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그룹을 만드는 게 현재로선 굉장히 유효한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김용언  네. 저도 마찬가지로 동의하고요. 플러스 사실 너무나도 많은 매체들이 있고 거기에 자신의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워낙 많기 때문에 그 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은 그 글이 정말 좋으냐 아니냐, 이 사람의 관점이 특별하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결이 되는 것 같아요. 정말 관심 있는 분야의 취향을 정말 확고하게 세우고 그것을 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적 자산이 갖춰져야 언제라도 지면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요. 출판사, 신문사, 어떤 매체로 직접 기고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죠. 거기서 일하는 저희는 그것들을 실제로 읽습니다. 읽고 나서 그 필자를 발탁하지 않는 것은 그 글이 좋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정말 스스로를 단련해야 하고 그 단련의 방법은 말씀하신 것들처럼 블로그부터 시작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이 이 시점에서 평론을 할 수 있을 만큼 나의 탁월함은 무엇이다, 라는 입장 같습니다.

소영현  앞에서 말씀하신 선생님들 말씀에 전부 동의하고요. 덧붙여서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거는 일단 세 가지인 것 같아요. 첫째는 요즘 우리 시대는 쓰기의 시대라고 보통 얘기를 하거든요. 소설은 아무도 안 읽긴 하는데 소설가 지망생은 엄청 많아요. 신춘문예에 보면 정말 70대 할아버지도 계시거든요. 20대도 많고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문학, 쓰기에 관심이 많구나. 블로그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식 등단 매체를 통해서 등단하고 싶어하는 쓰기의 욕망을 가진, 발언하고 싶어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엄청 많은데 그런 사람들의 정체성에 읽기는 별로 없는 거 같아요. 그게 되게 흥미로운 현상인 것 같아요. 정말 많이 좋은 걸 쓰고 싶으면 많이 읽어야 하는 거잖아요. 기본적으로. 근데 읽지는 않을 거면서 자기는 비평가가 되고 싶어하는, 이게 굉장히 독특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차적으로는 많이, 읽기, 그 다음에 접하기, 수용하기, 이런 거에 대한 열린 태도가 필요한 게 아닐까. 평론가가 되기 위해서라면 흥미 그 자체보다도 사회에 대한 열려있는 수용체로서의 자기 정체성, 정체화 이런 게 되게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그냥 하나 덧붙이자면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분야를 나눠서, 지금은 굉장히 분야가 전문화되어서 각자 분야에 대해서밖에 말할 수 없지만 이건 분명한 건데 문학 관심있는 사람이 많아져야 미술 관심있는 사람도 많아지고 음악, 심지어 음식도 비평이 가능하네, 이런 식의 발상이 가능한 거는 이런 거에 대한 전반적인 요청이 높아져야 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협업이 되게 중요하다. 앞선 선생님들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현장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현장이 뭐냐 그랬을 때 창작과 비평 사이의 갭을 줄이는 것도 또 하나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라면 그 분야, 분과, 영역별로 사이에 놓여있는 갭들을 서로 좁혀가는 거, 그 사이에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어딘가를 고민하는 거 이게 전반적으로 비평에 대한 열망 같은 걸 더 키우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근본적으로 토대를 만드는 작업이 되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용재  거기에 제가 한 마디만 딱 보태면요. 이것이 비단 음식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예를 들어서 제가 음식을 먹어야 되죠. 먹으러 다니면서 왜 음식이 맛이 없는가, 고민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음식의 문제를, 음식에 대한 답을 음식 안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기능중심의, 그런 기능이 많이 발달되지도 않았지만, 예를 들어서 커피를 한다 그러면 나는 커피만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게 아니고 전반적인 이해가 있어야 되죠. 와인도 먹어야 한다 그러면 이외의 것들이 필요합니다. 책을 읽어야 한다든지 자기의 철학과 시각을 가져야 하는 그런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것은 음식 바깥에 있는 거죠. 그거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하고 굉장히 저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백지원  이용재 선생님께서는 음식을 평론하시는데 주로 평론을 하실 때 다양성과 탁월성, 그리고 전통과 혁신이라는 잣대가 있을 때 어느 쪽이 더 비평적으로 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하시나요?

이용재  사실 그 질문이 굉장히 까다롭다고 생각하는데요.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의 전문 분야인 음식에만 지각을 좁혀서 생각한다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이라는 것이 얼마만큼 전통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굉장히 크거든요. 예를 들어서 저는 전통이 움직이는 개념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실제로 전통이 움직여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뭐 인류가 빵을 처음 구웠을 때는 장작불에 밀가루 덩어리를 얹어서 대강 구웠겠죠. 근데 지금 현재는 기계가 정확하게 0.1도까지 통제를 해주는 오븐을 통해서 빵을 굽거든요. 그럼 저는 과연 그 안에서 저희가 전통이라고 생각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계속 고민을 하거든요. 그게 한국음식 쪽으로 넘어오면, 사람들이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산자의 편의를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기믹(gimmick) 같은, 일종의 그런 설정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거든요. 실제로 뭐 그런 거죠.

자꾸 빵 얘기를 하게 되는데 (객석 웃음) 예를 들어서 어느 빵집에 갔단 말이죠. 빵이 맛이 없는 빵집에 갔습니다. 그러면 묻는 거죠. 예를 들어서 단팥빵인데, 팥 앙금을 직접 만드세요? 물었더니 안 만든대요. 옛날에는 가마솥을 걸어놓고 팥을 쒔죠. 그런데 지금은 중국산 진공 포장된 앙금을 들여와서 방금 만든 걸로 포장을 해서 700원 800원쯤에 파는 거예요. 그럼 저는 그런 고민을 하는 거죠. 과연 옛날에 우리가 지금보다 어렵게 살았던 시절에 마가린을 넣고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어서 팔던 그러한 것을 우리가 지금 전통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그거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데요. 지금 우리가 그것을 전통이라고 내세울 수 없다면 현재 우리는 어떤 부분을 보정해서 우리의 현재로 삼고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전통과 혁신 이런 거에 대한 얘기를 선을 긋는다는 게 제가 대상으로 삼는 거에서 굉장히 모호한 부분들이 있고요. 그것들을 사실 어느 면에서는 좀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더 크게 보았을 땐 왜냐면 현재 음식만 놓고 보았을 때는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정신적인 족쇄로 작용하지 않는가, 음식의 전반적인 포맷이랄까요. 우리가 먹는 음식인 밥과 반찬의 형식, 이런 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이 젊은 세대들의 삶의 양식 속에서 그런 것들이 과연 도움이 되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얘기가 약간 산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구분을 하는 것 자체, 어떤 것이 전통인가 어떤 것이 혁신인가 그것을 굳이 구분을 해서 제가 평가하는 대상에서 그것만을 찾아서 본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약간 모순이거나 어쩌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백지원  예를 들어서 파인 다이닝 같이 역사적 유래가 깊은 종류의 서양 음식에서 한국에 그거를 수입해왔을 때 굉장히 현지화가 돼버린다는 거죠. 원산지의 맛과 다르게.

이용재  그런 부분은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현지화라고. 소위 말하는 ‘우리 입맛’인데요. (객석 웃음) 저는 그것이 얼마만큼의 고민의 산물인가를 봅니다. 그것이 예를 들어서 정말 프랑스에서 먹는 대로 먹어야 되는가, 서양에서 짜게 먹는 것을 그대로 그렇게 먹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고요. 과연 그 음식이 현재 우리가 속한 맥락 위에서 사고의 과정을,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과정을 겪었는가. 혹은 겪지 않았는가. 저는 오히려 그거를 보고 그거에 따라서 굉장히 많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죠. 다만 답은 달라요. 모두가 다 다른 답을 내놓는데요. 그 답이 제가 생각하는 만큼의 어떤 사고의 결과물이 아닐 때에만 실망스럽고요. 소위 말하는 우리 입맛이라는 것이 대부분은 고민 없음의 결과물이나 흔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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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원  김용언 선생님께서는 잡지를 창간하시면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분과를 설정하셨잖아요. 과연 이렇게 설정을 하는 게 지금 문학이라고 하는 예술의 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 기존에 <판타스틱> 같은 경우는 장르문학이라는 용어로 지칭을 했었잖아요. 하지만 이 장르문학이라는 호칭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생산자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많은 이견이 있고 또 주로 취급하시는 소설의 종류들을 보면 이거에 대해서 추리소설이다, 탐정소설이다, 범죄소설, 하드보일드 이런 식으로 굉장히 다양한 지칭들이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명칭을 새롭게 정의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김용언  <판타스틱> 시절 ‘장르문학 전문잡지’라고 불렀던 건 궁여지책의 산물이었어요. 뭐냐면 미스터리랑 판타지, SF, 그리고 호러, 심지어 가끔은 로맨스까지도, 소위 순문학이 아닌 이외의 문학들에는 그런 식으로 꼬리표를 붙이고 경계선을 긋잖아요. 그것들을 저희는 다 골고루 다루겠다,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잡지를 소개할 때 저희는 판타지, SF, 미스터리, 호러, 로맨스를 다루는 잡지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편의상 순문학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장르들을 다룬다는 의미로서의 장르문학 전문지라고 부른 겁니다. 미스터리 같은 경우는 추리소설, 범죄소설, 미스터리소설, 하드보일드 등으로 불릴 때가 많은데, 그것 역시 그 장르 내에서의 한 갈래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수수께끼 풀이에 더 신경 쓰느냐 범죄의 컨텍스트를 더 중요시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부를 수 있어요. 그건 발화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해외에서도 디텍티브 픽션, 미스터리, 크라임 픽션 등 발화자가 상정하는 범위에 따라 자유롭게 골라 쓰는 편익고요.

지금 준비하는 <미스테리아> 잡지 입장에서는, 범죄가 핵심이고 꼭 수수께끼를 풀 필요는 없지만 범죄가 핵심에 놓여야 하고, 그 범죄가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되기 힘든 그런 작품들, 그리고 범죄를 통해서 확실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작가가 던져주는 작품을 청탁하고 있어요. 뭐랄까, 이제 시작인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양이 구축되어야 질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동안 번역된 해외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온 독자들은 상당히 많고 그 세월도 길지요. 이제 그 독자들이 미스터리 소설을 쓰겠다는 욕구를 가진 작가들로 성장해나가는 지금 상황에서, 이들을 불러 모았을 때 그 양과 질이 해외 미스터리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엔 너무 부족하고 유치해보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그 작품들을 최대한 끌어모아 양적인 면을 구축하고, 거기서부터 질적 전환을 가져오고 싶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소영현  궁금한 것 좀 여쭤 봐도 되나요? 지금 말씀하신 거중에 제가 평소에 궁금했던 거 질문 여쭤보고 싶은데 지금 말씀하시는 그 소설 바깥 선의 최저선에는 순문학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비순문학 계열이 선생님이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목하고자 하는 범주인 거 같은데, 저는 문외한이니까 이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도 있는데 서구에서는 이미 그런 논의가 많이 있었고 순문학 비순문학 그런 논의가 많이 있었고 나머지를 이른바 대중문학이라고 하는 장르가 활성화돼서 인기도 되게 많이 끌고 그랬는데 한국에서는, 농담으로 그런 얘기하잖아요. 한국에서 SF는 고급, 엘리트들이 보는 특수 장르다 얘기를 하잖아요. 책 한 권이 나와도 500권이 안 팔리고. 그런 얘기를 제가 지나가면서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에 외국에서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특수한 영역이 되는 게 있잖아요. 아까 그 이용재 선생님 말씀하신 것과 연관되어 있는데, 현지화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한국의 이른바 순문학이라고 하는 거, 이제 이런 구분이라는 것도 별로 의미 없지만, 순문학이라고 하는 것에도 이렇게 범죄 내러티브나 그런 게 많이 들어가 있잖아요.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한 새로운 범주 규정이 필요하지 않은가, 굳이 비순문학이라고 선 그을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서 제가 문학비평을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사실 아주 전통의 문학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요. 문학의 범주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어떻게 생각하면 만날 수도 있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쭤보고 싶거든요. 이건 왜 비순문학이라고 꼭 선을 그으셨는지에 대해서.

김용언  사실은 약간 방어적인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를 예로 들자면,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는 것과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는 게 저한테는 하등 다르지 않거든요. 저한테는 그 독서가 똑같이 재미있고 좋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장르문학 잡지를 만들고 종합지 서평 섹션에서도 일할 때 이런 저런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깜짝 놀란 점이 있어요. 생각보다도 너무나도 강고하게 순문학과 장르문학이 나뉘어 있더라고요. 소위 문단이라고 하는 제도 내의 질서가, 제가 순진하게 독자로서 생각했던 것과 달리 굉장히 강고하다고 생각을 했었고요. 그 상황에서는 사실 미스터리 소설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했을 때 좀 방어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일종의 전략이었죠. 다만 이런 애로 사항은 있습니다.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역사적 기반은 정말 형편없을 정도로 얕고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미스터리 소설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수능 시험 대비용으로 배웠던 옛날 단편들 있잖아요. 저는 그런 작품들에서도 범죄소설적인 측면을 분명히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런 의외의 요소들을 끌어와서 저희 잡지를 통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보고 싶어요. 문단에 파문을 일으킬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고요. 다만 그 소설 읽기, 재미있는 스토리를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좀 더 폭을 넓혀보자, 같이 넓혀보자는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백지원  지금 두 분이 말씀해주신 것들이 제가 현대적 개인에 대해서 준비했던 질문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연관되는 것들을 지금 질문을 드리도록 할게요. 일단 김용언 선생님께 질문이 있는데 미스터리 소설은 보통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와 그것을 해결하는 탐정의 서사로 구성되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근현대적 개인으로서 사건에 도전하는 주인공을 한국 문학 전통 안에서 도출시키는 데 어려움은 없을까요? 한국의 미스터리 소설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이 있었고요. 소영현 선생님께는, 소영현 선생님이 전에 책을 쓰셨을 때 한국문학의 성장소설 계보에는 근현대적 개인의 갈등과 그를 통한 사회로의 편입이라는 주제가 빠져있다고 하셨는데, 한국문학에서 과연 근현대적 개인이라는 개념이 부재를 하는지,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혹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김용언  한국소설의 미스터리 소설 역사가 굉장히 짧다고 말씀을 드렸고요.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 19세기 말부터 탐정이라는 존재를 등장시키면서 미스터리 소설의 역사를 스스로 다져왔잖아요. 이제 와서 한국 미스터리 소설이 홈즈 같은 탐정을 등장시키는 건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현지화를 어떻게 시킬 것인가, 한국사회에서의 현대적 개인이 미스터리 소설의 주인공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저도 사실 시작하는 입장이고 계속 읽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저희끼리는 그런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한국 사회 같이 미스터리 쓰기 좋은 나라가 어딨을까, 소재가 널려있고, 미궁에 빠진 것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그것을 굳이 해결하지 않더라도 그 미궁을 전체를 조망만 해주더라도 굉장한 소설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요. 어떻게 보면 전근대적인 요소가 아직도 자연스럽게 우리 일상에 녹아들어있는데, 추리소설이라는 대단히 근대적 양식과 그런 한국의 전근대적 요소가 맞부딪히면서 흥미진진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해요. 그게 쉽지가 않은 게 왜 그럴까, 어떻게 보면 무척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제 사견임을 전제하고 말씀드리자면, 한국 소설들이 비단 미스터리 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작가들의 직업이 그야말로 ‘작가’인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좀 부족한 지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해요. 순문학 경우에도 주인공은 항상 작가거나 편집자거나 그런 경우 너무 많잖아요. 작가가 아는 세계가 딱 거기에 한정되어버린다면, 그 이외의 세계에 대해서 너무 얘기를 못하는 거 같아요. 영미권 미스터리 소설계에서 제일 부러운 건 법의학자, 판사, 변호사, 검사, 병리학자, 범죄 전문 기자 등이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본인의 전문성을 투영시킴으로써 소설의 외연을 계속 확장시켜주잖아요.

저희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그게 어렵지 않은가, 이를테면 경찰 수사의 디테일에 대해서, 형사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형법 체계 혹은 사법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떤 건지 모르기 때문에, 이 좋은 소재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개인을 선명하게, 현대적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은 거라고, 그 디테일을 작가들이 혹은 독자들도 잘 모르기 때문에 쉽지 않은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부분이 앞으로 과제라고 생각을 해요. 두서없이 얘기해서 잘 전달이 됐을까 모르겠는데요. 현대적 개인이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어느 정도 전제될 필요도 있지 않나 싶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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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현  그거에 대해서는 저도 약간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한국에서 법의학자가 소설을 썼다 그러면 이거는 소설 써보지도 않은 사람이 소설을 쓰네 이런 식의 반응이, 소설 영역을 넓혔다 이런 게 아니라 오히려 망가뜨렸거나 오염시켰다 이런 식의 반응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문제적인 점이 많은 것 같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지금 하시는 작업에 대해서 범주 확장을 하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차원이냐면 이런 거잖아요. 정유정의 “7년의 밤” 다 아시다시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고 한국에서 나온 한국 작가가 쓴 한국 사회에 관련된 미스터리치고는 정말 굉장히 인기를 끈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재밌는 현상인데, 선생님 말씀하시는 순문학지, 문예지에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거든요.

김용언  정말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영현  예, 그렇죠. 근데 또 그런 걸 언급하거나 그런 거에 관심을 갖거나 하는 비평가, 평론가들이 없는 건 아니고요. 이거에 대한 문제제기를 끝없이 또 하고 있는데 여전히 강고한 고리타분한 옛날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문학성이 마치 지켜져야 될 성배라고 되는 것처럼, 숨겨놓고 싶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시는 분들이 또 있고 그런 사람들은 수적으로는 소수거든요. 문제는 뭐냐면 그런 분들이 굉장히 주류고 권력을 가지고 있고 문학 출판 장에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이런 분위기를 쇄신하는 공격적인 논의도 필요하지 않을까, 저는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동의하고 있고요.

성장소설, 이것도 연결시켜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 문학에서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때는 항상 이전 세대를 치면서 등장했어요. 예를 들면 80년대에 이전 운동권 세대가 등장할 때 70년대의 그 나이브함, 현실에 대한 낭만적인 접근이 문제야 하고 80년대 세대들은 전투세대가 되었고 90년대에 세대가 또 돌변하면서 그런 모든 것을 운동과 정치로만 환원하는 세대의 획일성을 비판하면서 등장해요. 이런 식으로 해서 한국 사회의 면면은 항상 이전 세대에 대한 대항, 전면적인 부정을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국 문학도 사실 마찬가지거든요.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소설이 많이 등장을 해요. 왜냐면 아버지시기에, 예를 들면 식민지시기에 찌질했거나 아니면 살아남았으면 친일했거나 이런 거거든요. 부정할 수밖에 없는 거죠.

생각해보자면. 쭉 역사가 그래왔는데 6.25부터 면면이 다 그런 건데, 서구에서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좀 더 공격적인 얘기로 하자면 원래 이게 독일에서 교양소설이라고 해서 사회에 입사하기 위해서 주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들을 흡수하게 하는 그런 근대적인 개인이 만들어지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거를 읽고 사회에 입사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한국에는 사실 그런 게 거의 없는 거죠. 교양을 쌓아서 사회 일원이 되는 게 아니라 이전의 세대를 부정하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그래서 자기 존재를 마련하는. 그 바람에 문제는, 여기 선생님들이 다 지적했다시피 한국이 축적된 역사라는 게 참 없는 거예요. 매번 다 무화시키고, 쟤네가 한 건 다 이상해, 이런 식의 의식에 굉장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지고 있는 반-거부하는 의식이 지금의 우리의 비평이나 이런 거에 대해서 굉장히 빈곤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성장소설 자체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이런 얘기는 조금 더 다른 차원의, 이전 세대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문맥과는 조금 다른 메타적인 일관성, 아니 일관성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역사적인 흐름, 문맥 같은 것을 조금 더 거시적으로 들여다보는 시야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이제 그 범죄소설 연관시켜서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그런 것 같아요. 한국 소설에서 성장소설이라는 건 별로 의미가 없거든요. 딱히 떠오르시는 게 없을 거예요. 뭐를 읽고 걔가 아름답게 성장했거나 그런 경우가 거의 없어요. “박하사탕”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케이스인 것 같아요. 나는 이제 돌아갈래, 왜냐면 다 망가졌거든요. 살아온 게 망가진 인생이거든요. 거기에 순수했던 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돌아갈래’예요. 나는 성장한 게 아니에요. 망가진 거예요. 한국 사회의 모든 어떤 인물 형성 과정이 사실 그런 식으로 구성이 됐거든요. 이게 깨진 게 저는 청소년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아마 “완득이”는 다 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완득이”가 청소년 소설이란 범주를 새로 한국에 만들었거든요. 물론 이전에 “얄개시대”나 그런 것이 1970년대, 60년대, 50년대에도 있었는데 그런 역사가 사라졌고 그게 다시 만들어진 게 “완득이”예요. 이전의 청소년 소설은 주제가 완전 달랐어요. 성인 소설이 있었고 청소년 소설이 있었던 거죠. 지금 순문학이 있고 비순문학이 있는 것처럼, 그랬는데 현재 청소년문학이 등장하면서 청소년의 성장을 얘기해보겠다는 주제의식이 생겨났어요. 그러면서 한국에 이전에는 없었던 성장소설의 문맥이 들어온 거죠. 예전 식으로 말하자면 성인소설과 청소년소설이었던 범주가 이제 바뀌어서 문학사 내에서의 성장소설에 대한 논의로 바뀐 거거든요. 그런 식으로 해서 아마 문학에 대한 개념, 범주 이런 것도 재편성이 되는 거니까, 이런 차원에서 얘기 하자면 뭔가 새로운 범주에 대한 논의를 만들어내면 순문학 대중문학의 불필요한 논의 같은 거는 조금 바뀌지 않을까, 이것도 두서없는 얘기네요.

임근준  저는 한국에서 미스터리 소설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사실 현대적인 개인의 자아상을 그려내는 방식 자체가 한국 사회가 서구와는 다른, 끝까지 내면세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현대화되지 않은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예를 들면 미스터리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라고 하면 문제적인 상황 곱하기 캐릭터잖아요. 캐릭터는 내용이 뭡니까. 오프킬터(off-kilter) 캐릭터죠. 정상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시민성에서 조금 벗어난 괴짜 캐릭터를, 입체적인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내고 예를 들면 셜록 홈즈 같은 사람이 있고 셜록 홈즈 같은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와 상황을 계속해서 곱하기해서 매번 변주해내는 것이 미스터리 소설의 기본적인 컨벤션이라고 한다면 한국사회에서 미스터리 소설이 되지 않는 건 양쪽이 다 문제가 있는 거죠. 한국 사회에서는 늘 비정상적인 상황이 연결되어서 일상을 구성하기 때문에 특정한 비정상적인 상황을 디자인해서 기존의 안정된 사회를 비평할 수가 없고 캐릭터 자체도 각 개인이 엉망진창, 현대화되지 않은 비균질한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오프킬터 캐릭터, 입체적인 인물, 셜록 홈즈 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가 없는 거죠. 한국인은 개개별로 너무나 괴상한 인간들이 넘쳐나기 때문인 거죠. 그런 이유에서 저는 한국에서 미스터리 소설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한국어로 잘 써내면 절대로 이것이 그럴듯하지 않은 거예요. 판타지를 투여할 수 있는 공간과 인간 캐릭터를 만드는 데 양쪽 모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축, 결국은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하는 게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문학의 하나의 패턴을 훔쳐다가 컨벤션으로 계속해서 배리에이션을 돌리는 게 매력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한국의 순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서사를 구축하는 데 어느 정도는 실패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예를 들면 일본 문학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하나의 대서사가 있고 그 대서사에 맞춰서 특정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이 그 사건에 말려들어서 어떤 숙명적인 사건, 상황에 문제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되요. 그 드라마틱한 한 순간에 내가 결정을 내려서 어쩔 수 없는 사건에 말려들게 되고 그것을 해치우고 귀결에 도달하면서 결국은 현대적인 개인으로서의 내면이 변화하는 과정, 내면을 묘사해서 사건을 통해서 한 인간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저는 현대적인 서사에서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의 드라마의 전개, 이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주인공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이 변화를 어떻게 개인이 스스로의 결정을 통해서 감내해내는가, 여기서 발생하는 숭고미, 서브라임(sublime)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근대소설에서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일본과 한국의 현대문학에서 한 캐릭터의 내면이라고 하는 것은 숙명적으로 정해져있고 그것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망가지는 것을 서사로 제시하죠. 자기가 망가지는 걸 감수하는 현대적 개인의 희생을 드라마틱하게 제시하는 게 아니라는 면에서 이게 서구의 서사와 상당히 닮아있기 때문에 차이가 잘 안 보이는 경향은 있어요. 하지만 사실 지금까지도 당대의 문학에서 한국과 일본의 소설은 한 명의 개인이 갖고 있는 특정한 내면의 구조는 숙명적으로 타고난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인간 스스로의 결정과 노력과 특정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서 업데이트한다고 하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결국은 주류 순문학과 그 외의 문학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한국에서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바람이 일기는 일었지만 사실 보면 지금 다시 보면 리얼리즘이죠. 포스트모던하지가 않아요. 뭐 예를 들면 서구에서 “와이드 사갈소 시(Wide Sargaso Sea,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고 하는 소설 같이 원래 존재하는 근대소설을 슬래시쳐서 제 3자 다른 캐릭터의 입장에서 다시 묘사해내는 것이 포스트모던에서의 가장 중요한 실험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원래 존재했던 근대 문학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2차 창작 형식의 포스트모던한 소설을 써낸 케이스가 있느냐 하면 존재하지 않죠. 저는 한국에서 정말로 현대적인 내면, 현대적인 자아상에 관심이 있는 소설가가 포스트모던 세대가 있었다면 늘 생각하는 게 “을화”를 다시 썼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통사회의 세계관과 기독교를 통해서 받아들인 서구적 세계관의 충돌을 가장 먼저 잘 드러낸 소설이 “을화”라고 하면 저는 전부터 생각하고 있는 게 “을화”에 등장하는 벙어리소녀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세계관과 오빠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과정을 얼마든지 새로운 관점에서 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종류의 시도는 한국에서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사실 미술도 비슷합니다. 미술에서의 현대적인 자아상이라고 하면 가장 큰 게 화가가 진리가 세상 밖에 존재하고 그것을 포착한다고 하는 고래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내가 대상을 보고 있다는 주체, 시각적인 경험 자체가 서브젝트 매터(subject matter)로 등장한 게 19세기 말, 그러니까 세잔 때부터잖아요. 그래서 모마에 우리가 놀러가도 맨 처음에 등장하는 게 세잔의 그림부터 안내가 나오기 시작하는 거고. 결국은 그 다음 번 단계에서 결국은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이해도를 심도를 점점 높여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변화도 등장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이 끝난 다음에 현재 결국은 모더니즘을 다시 구조화해서 다시 한 번 기동시키는 방식, 오늘날의 2010년 중반의 문제의식까지 와 있는데 결국은 이제 바탕에 있는 것이 우리는 근대화를 일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 여러 가지 제도나 사회상이나 모든 것이 서구화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맨 마지막 차원,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자아상이라고 하는 것만큼은 여전히 현대화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이 구조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우리 한국사회의 예술분야에서는 그게 미술이건 문학이건 뭐가 됐건 간에 이 자아상을 재탐구하고 자아상의 내면의 구조에 현대적인 지점이 있다고 하면 이게 무엇인가 논쟁을 벌이는 게 저는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백지원  여기까지 들으시고 이제 플로어에서도 질문을 해주실 분이 있으면 해주시겠어요?

관객1  안녕하세요. 이 행사 기획팀의 백희원이라고 하고 이 라운드테이블을 기획하지는 않았지만 플로어에 질문이 진공상태로 가고 있을 때 질문을 만드는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웃음) 저는 되게 간단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여기 오신 패널 분들은 창작에 대한 비평을 하시는 분들이잖아요. 근데 대중적으로 그 비평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일반적으로 네이버 댓글을 보면 되게 전반적으로 다들 비평을 싫어하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반지성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부분들에 대해선 신경을 쓰시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을 하시는지 이것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문제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신지 다양한 의견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용재  제가 먼저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굉장히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집에 대한 리뷰를 블로그에 쓰면서 셰프의 철학과 추상적인 맛의 재현 이런 거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간접적으로 들었는데 누군가가 추상적인 맛 타령을 하다니 저 사람은 피곤해서 어떻게 살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해요. 지금까지 말씀하셨던 현대적 자아상에 연결되는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문제가 어떻게 보면 전반적으로 개인이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음식에 대한 담론으로 보기를 좁히자면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이 되자’라는 거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식을 선택하는 게 사실은 개인적인 이유가 거의 없습니다. 회사 다니시는 분들은 회사에서 모두가 먹는 것을 따라가서 먹는 회식이 존재하고요. 이러한 부분에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음식을 먹고 있고 우리의 전통적인 식사 형태 자체도 개인보다는 주로 공동의 식탁 위주로 형성이 돼 있거든요. 이러한 부분을 우리가 봐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만들 순 없잖아요. 어느 부분에서는 생산자, 담론의 생산자로서 적당히 눈을 가려야 될 부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씀이냐면 누군가는 어떻게든 비판을 하거든요. 그러한 것들을 모두 의식을 한다면 사실 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특히 이제 저 같은 경우는 항상 그 식사와 식탁에는 보수적인 관점들이 존재를 합니다. 크게 봤을 때는 음식에 대해서 불평을 하면 안 된다는 시각이 존재를 합니다. 식탁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라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아까 말씀을 잠깐 드렸지만 우리 입맛의 현재 식탁의 형태, 이런 것에 대한 보수적인 관점들이 존재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으로는 현대적인 자아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릴 건데, 제가 현재 우리나라의 음식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적 개인의, 현대적 개인의 자아상을 가진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지금까지는 대부분 소위 말하자면 ‘에미야 국이 짜다’ 하는, (객석 웃음) 가부장적인 사고에서 내가 정확하게 생산의 전반적인 이치를 꿰뚫어보지 못하고 하는 말들이 대부분이었죠. 요즘 맨스플레인이라는 말이 유행하잖아요. ‘내가 이 음식에 대해서 알려줄게’ 하는 남성 캐릭터들, 윗세대는 다 그런 캐릭터들이었거든요. 우리나라의 음식담론을 주로 맡았던 사람들은 고 백파 홍성유 선생님 같이, 이규태 선생님이랄지, 디지로그 같은 데서 말씀하시는 이어령 선생님 이런 분들 음식에 대한 담론이 대부분 가부장제랄지 민족주의랄지 이러한 개인이 아닌 이념이나 이런 데 함몰된 듯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의 목표는 그러한 것들을 한 데 두고 개인의 산물인 음식을 개인이 보고 개인의 시각으로서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담론이 다시 각각의 개인에게 흘러들어가서 재순환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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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준  음식하시니까요.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사실 한국에서 서양요리를 배워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들도 내가 음식의 역사에서 특정 분야의 요리사로서 특정한 레시피를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서 새로운 지구상에서 이 요리에서 내가 가장 새로운 입장을 제시하는 요리사가 되겠다고 하는, 소실점을 바라보고 요리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잖아요. 국내에.

이용재  국내에는,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저는 사실 없다고 현재까지는 보고 있습니다. (웃음)

임근준  예전에 한국에서 정말 요리 잘 하는 요리사들 만나서 얘기할 때에도 굉장히 충격 받았던 게, 제가 미술 쪽이니까 음식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면 좋아하는 요리가 뭐냐 하는 얘기가 가볍게 스몰톡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면 서양 요리사임에도 불구하고, 파티셰거나 이런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뚝배기요” (웃음) 이렇게 나오는 경우들이. 기분이 나쁜 거죠. 그러면 사실 평론가로서는 비평할 때 굉장히 어려운 지점들이 발생하잖아요. 소실점을 보고 창조하는 사람이 없는데 비평을 해야 되니까요. 그런 문제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이용재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요. 다만 가끔 의욕이 굉장히 없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비평가와 해설자는 좀 다른 입장이라고 생각하고요. 저는 해설을 원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생각하는 음식의 완성형이라는 것은 결국은 다른 예술처럼 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을 해요. 컨셉이라는 게 존재하고요. 어떤 생각의 산물로서 컨셉이 존재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는 기술, 그것이 조리의 테크닉이 되겠죠. 그 두 가지가 정확하게 맞물리는 지점이 존재해야 어떤 음식이 완성이 된다고 보는데요. 그런 음식을 사실 찾아보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사실 비평자 입장에서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미래란 없다고 말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노릇이죠.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원래 무엇을 봐야만 하는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의 입장은 다른 분들하고 좀 다르게 음식 비평이 존재하는가 자체가 지금 현재로서는 일종의 논란거리거든요. 저는 그 상황에서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든 존재를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국면의 전환, 시각의 전환, 아니면 좀 더 높은 이상을 품어야 한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까지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하나는 동물적인 측면이 있죠. 배를 채워야 되는, 살기 위해 먹어야 되는 음식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고랄지, 혹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영혼-육체 (psycho-somatic)적인 존재이기에, 배를 채워야 하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으면 사실 굉장히 사람들은 불행하죠. 그러한 측면도 존재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반복해서 밝히는 게 사실 저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 한편으로 굉장히 피로할 때는 있습니다.

임근준  영국요리가 보통 서양에서는 후졌다고 말을 하고 고급 요리는 프랑스나, 조금 더 나은 이탈리아 요리를 영국에서 수입해서 현지화하는 이런 게 그 나라에서도 계속해서 딜레마잖아요. 대표적인 게 스타 요리사인 제이미 올리버 같은 경우 이탈리아 음식점으로는 계속 돈도 많이 벌고 성공을 했습니다만 결국 나머지 욕심, 본인의 최종 목표는 영국 전통 음식을 현대화해서 제시해서 힙하게 성공시키는 거였는데 쫄딱 망했잖아요. 근데 영국조차도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 양요리를 배워다가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서 새로운 남한의 퍼스펙티브를 부여해서 새로운 비전, 동세를 창출한다 이런 목표를 갖고 있는 요리사가 없다면 평론가로서 활동을 하는 데 미래가 좀 어두운 거 아녜요? (객석 웃음)

이용재  사실 그 부분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네. 어두운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요.

임근준  그런 요리사가 일본엔 있잖아요. 일본엔 꽤 많잖아요.

이용재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의 전반적인 문제는 제가 계속해서 얘기를 합니다만, 이것이 극단적인 기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생기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조리학교에 공부를 하러 가면 사실 중요한 것은 양파를 썰고 소스를 만들고 이런 것도 있지만 영화도 볼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고 그러한 것들이 한 데 합쳐져서 나의 퍼스펙티브가 형성이 돼야 하는데 그것을 음식이라는 포맷으로 재생산하는 것 바로 그것이 목표인데요. 예를 들어서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산자와 친분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만, 일상적인 얘기들 있잖아요. 음식의 기술적인 이론은 차치하고서라도 예를 들어서 좋아하는 음악이 뭔가, 내가 요즘 어떠한 책을 읽었는가 이런 것에 대한 얘기도 사실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그것이 굉장히 자연스럽다고 생각을 하는 거 같아요. 이것이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우리가 한 가지를 잘하려면 그것을 계속해서 잘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서양요리라 하면 어떻게든 음식을 썰고 고기를 썰고 양파를 볶고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다만 이러한 측면에서 굉장히 좌절스러운 부분이 분명히 임근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존재를 합니다. 하지만 다만 한편으로는 저의 몫이 있는 거겠죠. 제가 해야 될 일이. 그것이 영예나 명예나 돈이나 이런 것과 별개로, 그렇다면 이것이 완전히 현재에 아무 것도 없다면 무주공산이라면 어쩌면 거기에서 쌓을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임근준  좌절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예를 들면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서양요리를 배워서 토착화해서 역사적으로 재해석해서 동세를 구현해서 새로운 퍼스펙티브, 비평적 퍼스펙티브를 제시하는 요리사가 아직은 없다, 라고 한다면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솔직히 생각을 해봐야 하잖아요. 그러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하나가 요리를 공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죠. 역사적인 퍼스펙티브 못 갖고 기능으로만 요리를 하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라고 하면 내면 차원에서 맛의 시각화라고 하는, 현대적인 의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비시각적인 요소를 시각화해서 개량화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막걸리 붐이 일기 전에 와인 붐이 있었잖아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그러면 그게 웃기다고 비웃을 게 아니라 와인 맛을 비평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시각화잖아요. 소위 바디감이라고 말하는 기본 개념이 있고 스타트할 때 맛이 있고 끝날 때 맛이 있고 다종다양한 맛이 붙는 거니까요. 이거를 시각화하는 방법을 좀 더 교육을 잘 시킬 수 없었을까, 그때의 엉터리 소믈리에들 말고 제대로 된 와인비평가가 있어서 한국식 음식에 맞는 와인 맛의 지도를 그리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가 있고, 또 하나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음식문화라고 하는 게 어느 정도 생긴 거 아니에요. 소위 힙한 된장음식들이 나름대로 시장이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면 여기에 뛰어든 요리사들 가운데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자기만의 비평적인 퍼스펙티브를 갖고 요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창작자들, 요리사들과 만나서 그들이 다음 번 단계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쿡 집어서 추동을 해야 되는 게 평론가의 역할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거예요. (객석 웃음)

이용재  이런 부분이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음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얘기를 하는 거 자체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어떠한 경로로 들어오든지 간에. 한편으론 좀 당황스런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임근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느 부분에서 이것의 교육의 역할이 필요한 것인가. 제가 일하고 있는 씬의 특수성 때문에 교육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임근준  아니요. 그러니까는 근본적으로 이상적이라고 하면 요리학교에서 요리의 역사를 가르치시고 크리틱 시간에 표창을 날려서 표창을 평소에 맞아 버릇하게 해서 비평에 대해서도 어플리케이션(application)이 있는 사람이 되겠지만 그건 좀 어렵다고 치면 그래도 현재에 자존심을 걸고 직접 음식점을 차려갖고 맨날 적자보면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셰프들이 있잖아요. 그럼 본인이 추구하는 방향이 있고 그 방향이 더 정련돼서 한 단계 더 업데이트가 되려면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럼 이제 멀리 떨어져서 글을 쓰고 자극을 주는 것도 좋겠지만 평론가가 미술가들이 스튜디오 브리핑을 해서 발제를 해갖고 다음 번 작업에 대해서 서로 논의를 하거나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듯이 음식 평론가들도 특정한 메뉴가 나오기 전에…

이용재  우리나라에는 그런 일을 하시는 훌륭한 분들이 있잖아요. 파워블로거라고. (객석 웃음) 사실 원래 구조적이고 거대한 문제라서 지금 여기서 어떻게 말씀드릴지 지금 머리가 많이 안 돌아가고 있는데요.

임근준  평론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건 어쩔 수 없죠. 미국에서도 맨날 얘기하는 거잖아요. ‘Nobody loves a critic’이라고. 근데 그래도 왜 나를 알아봐주는 혹은 작가를 알아봐주는 사람이라고 비평가가 유명해지면 표창 맞는 건 아프지만 어쨌든 이제 작가들이 연락을 하게 되잖아요.

이용재  사실 다른 분야에선 생산자와 평가자가 어떻게 메카니즘을 갖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임근준  그거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생산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용재  제가 이런 의견이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게요. 제가 내일 나올 모 잡지에 드디어 본격적으로 레스토랑 리뷰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레스토랑 평가를 좋다 나쁘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제가 얘기하는 이상적인 음식비평의 형태를 지면에 박는 게 처음입니다. 이것을 관철시키는 것은 두 가지 문제인데요. 하나는 그러한 비평을 지면에 담는 것 자체, 두 번째는 그것이 저의 비용으로 나가지 않는 것. 일부를 받더라도 그것이 비용의 형태로 나오는 것. 이 두 가지를 이번에 최초로 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이 일을 몇 년 간 하고 나서, 왜 거리를 지켜야 하는가. 이런 부분이 문제가 돼요. 단적으로 레스토랑 리뷰를 하기 위해서 레스토랑에 간단 말이에요. 매체로부터 지원받는 돈이랄지 아니면 제 사비로 음식을 먹지 않습니까. 그럼 제가 대부분의 경우 혼자 가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저를 모르더라도 혼자 오는 사람들에게 자꾸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혼자 오는 사람들이 사실 드물죠. 게다가 나이 많은 남자가 혼자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또 신기하기도 한가 봐요. 그래서 뭔가를 줍니다. 주려고 하죠. 그런데 그것을 대부분 거절해야 되고요.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예를 들어서 와인 한 잔을 줬단 말이죠. 그게 시가 만 오천 원 한다고 해도. 나중에 어떤 거를 해야 되냐면, 제가 고민을 하다가 그 레스토랑에 고구마를 한 상자 보냈습니다. (객석 웃음) 잘 먹어서 그때 고마웠고 이걸로 간식을 하시라. 왜 그런 문제가 벌어지냐면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게 음식의 성질 때문에, 문학평론가랄지 미술평론을 하시면 예를 들어서 전시회에 가거나 책을 읽고 평가하는 거고, 매체를 섭취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존재를 해요. <뉴욕타임즈> 평론가들은 푸드크리틱을 3년 4년 하면 속이 만신창이가 되겠습니다만 꼭 회고록을 씁니다. 그 회고록에 주로 나오는 얘기가 내가 최대한 익명적인 존재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그러기 위해서 심지어 변장을 하고 연기코치를 받아서 음식을 먹고 그것을 이야기로 쓴 루스 라이쉴(Ruth Reichl)이라고 여자 평론가도 있거든요. 그러한 부분에서는 사실 음식만의 특성 때문에 제가 오히려.

김용언  독자와의 관계, 소비자를 어떤 식으로 상정을 할 것인가는 너무 어려운 문제여서, 정석적으로 얘기하면 너무 재미없는 얘기밖에 나올 수가 없고요. 사견을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그렇게 크게 기대를 하는 편은 아닙니다. (객석 웃음) 뭐냐면 이게 시장이 정말 작거든요. 영화지를 사보는 독자들의 시장도 너무나 작고, 미스터리 소설도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많이 팔리는 것 같지만, 그 간극이 너무 심하거든요. 예를 들면 2005년에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한국에서 거의 300만부 가까이 팔렸는데 정말 놀라운 기록입니다. 밀리언셀러라는 거 자체가 90년대 이후에 굉장히 드문 상황에서 해외 작가 소설이 그렇게 200만에서 300만 사이로 팔렸다는 거. 지금 나오는 영미권 미스터리 소설들은 대부분 천 단위예요. 2천, 3천, 4천 정도. 몇 천만부와 몇 천부 혹은 정말 천부도 안 될 수도 있는 소설들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실은 그 몇 백만이 허수에 가깝다고 생각을 하고. 정말 이 천 단위의 독자들, 코어 독자들이 가장 소중하고, 그 전후 플러스마이너스의 많지 않은 독자들까지만, 현실적으로 고려하려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몇 천 단위의 작은 시장이나마 미스터리 소설에 정말 애정을 가지고, 자기의 취향을 확실히 알고 있는 눈 밝은 독자들 몇 천 명을 소중하게 안고 가려고 하는 거고 그 이외에 대해선 딱히 기대를 하지는 않습니다.

거기다 아까 이용재 선생님 말씀하신 것까지 덧붙이자면 한국에서 글을 쓰거나 만들 때 제일 힘든 부분이 사적인 관계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면 영화제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기자들이 약간은 평론가 비슷하게 리뷰를 써야 할 때가 있잖아요. 한국 영화에 대해 쓸 때는 정말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면 만나게 되거든요. 취재를 가면 전화취재를 하든 현장을 가든 만나게 돼요. 너 내 영화를 욕했지? (객석 웃음)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되게 어색한 건 사실이지요. 누구나와 두루두루 잘 지내는, 같이 막 술 먹으러 다닐 수 있고 네 영화 좋다고 쉽게 써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하지만 전문지의 입장은 다르잖아요. 거기에 글을 쓰는 사람은 기자든 평론가든 정말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해외 영화를 맡는 걸 더 좋아하고요. 왜냐면 해외 영화는 아무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웃음) 한국 영화에서는 ‘우리가 남이가’가 아무래도 통하기 때문에, 비난과 비평을 구분하기 힘들고 쟤 나한테 감정 있나봐 해서 서로 편을 가르면서 서서히 멀어지고, 기사거리가 떨어지고, 이런 악순환이 없지않아 있어요. 또 어떤 면에서는 그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잡지의 광고를 주기 때문에 ‘갑’이 되므로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고, 그래도 이 소중한 작품들 덕분에 한국 영화계가 계속 관객들을 모으기 때문에,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서 쓰려고 노력하는 측면도 있고요. 미스터리 잡지의 경우, 아직 창간호가 나오지 않은 입장이라서 쓴 맛을 안 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업계 내의 창작자들, 책 만드는 사람들, 열혈 독자들이라는 일차적인 독자들이 가장 가깝고 중요하면서도 미워지기도 쉬운 그런 독자들 같습니다.(웃음)

소영현  아까 이용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거리, 그게 음식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중요하고, 영화도 얘기하셨지만 한국사회가 워낙 좁잖아요. 그래서 건너건너 다 알기 때문에 문학도 마찬가지죠. 저도 가급적이면 작가들 안 만나려고 하고 만나도 개인적인 자리에서 안 만나려고 하는, 정말 만나지 않으려고. 왜냐면 정말 다른 데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도 그렇고 소설 쓰는 사람들도 정말 힘든 부분이 많아서요. 그 사연 알면서 욕하기 쉽지 않고. 그거 자체로만 평가하기가 어려워지고 이런 측면이 있어서 이건 그냥 모든 비평가가 처해있는 어려움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저는 문학 비평도 마찬가지, 상황은 다 똑같은 건데 저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냐면 이거는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순 없는 거지만 저는 최고의 작품이 뭐냐, 이런 거에 대해서 논의하는 게 비평가냐에 대해서 요즘 좀 회의적이고요.

비평이 무엇을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하나는 저는 교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해요. 이게 비평 교육이라는 게 아니라 제가 가끔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데 비평이라는 게 특수한 어떤 영역, 문학작품을 어떻게 읽어내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다르게 볼 줄 아는 시각을 배우는 것이지 얘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봤을 때에 얘의 모양과 위에서 봤을 때의 얘의 모양은 분명히 다른데 이게 다르다는 거를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해서 벌어진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비평이라는 게 삶의 내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평가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이게 저변 확대되어야 전문적인 비평가도 나오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고, 이게 어떻게 저변 확대될 것인가 생각을 했을 때 저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이 교육은 되게 구체적인 건데요. 예컨대 우리가 문학을 잘못 읽는 이유는 여태까지 한 번도 문학을 제대로 읽는 법을 배워보지 못해서인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지금 비평가들은 문학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는데 여전히 우리는 뭐만 배우고 왔냐면 ‘님의 침묵’하면 님 이렇게 동그라미치고 이러면서 마치 문학 안에 딱 해명해야 할 진실이 들어있고 그거는 이렇게 일대일 대응으로 읽어야 되고 그러한 방식으로 문학을 읽어왔기 때문에 문학 비평에 대한 상이 잘못 만들어진 거라고 저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어떻게 만들어졌냐면 문학연구, 아까 임근준 선생님이 논문 말씀하셨는데 저도 논문 문제제기는 따로 해야 하고요. 대학 사회 내에서만 회자되고 실제로 새로운 비평, 문학 비평이라는 게 뭐냐에 대해서 배워야 될 사람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에서 국문학과에서 문학 연구하는 거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국어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그냥 독자가 되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어떻게 생각하면 독서지평 같은 것을 만드는 거, 교양의 수준을 높이는 거 이런 게 전문적인 비평가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을까. 독서 의식이라는 게 삶의 일부라는 거에 대해서,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보는 거,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를 만드는 거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거 이런 거를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관객2  저는 이용재 선생님과 임근준 선생님 저서를 평소에 애독하고 있는데요. 독자 입장으로서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을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이용재 선생님의 “외식의 품격”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음식이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책을 내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약간 소극적인 목표를 말씀하신 것 같고 적극적인 목표로 제가 읽었던 부분은 맛 또는 맛집에 대한 관념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 임근준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던 뇌내시각화라든지 건축의 비유로서 우리가 어떻게 좀 더 맛의 다층적인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지 보여주셨다고 생각을 하는데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책을 읽고 지적인 즐거움을 느꼈는데, 알고 나니까 맛집을 대하는 저의 태도도 많이 변해서, 음식을 먹다보면 부동산을 먹는 느낌도 나고 (웃음) 형편상 지갑을 계속 열 수 없는 시대 아니겠습니까. 음식을 대할 때 애티튜드라든지 몇 가지 실용적인 팁 같은 것을 알려주시면 그에 입각해서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음식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고요. 이어서 임근준 선생님께 마저 질문 드리고 싶은 부분은 이전에 현대적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몇 가지 자질들에 대해서 글을 적으신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생의 추상적 가치에 기반을 둔 소실점이라는 것을 제시해주셨는데요. 지식이나 평론 활동하시는 분들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저 같이 일반 개인에게 있어서 그런 소실점은 어떤 식으로 창출될 수 있고 어떤 식으로 저의 삶과 조응이 가능한지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이 있습니다.

이용재  사람들이 항상 많이 가지고 있는 오해가 있어요. 음식에 대해서 저 같은 존재를 미식가라고 레이블링을 하는 거죠. 근데 저는 제가 미식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요. 음식에 대해서 평가자가 돼야 한다거나 음식에 대해서 잘 알기 위해서는 고급음식만 먹어야 한다거나 아니면 예를 들어서 사실 여기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제가 준비를 했던 건데 뭔가 내가 음식을 해먹는 존재가 되려고 할 때 어떻게 쌓아야 하는 기술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이 들어왔어요. 저는 항상 그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운동을 하면, 저도 일주일에 두 번씩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습니다만 제가 운동을 하려면 어떤 삶의 전반적인 우선순위를 바꿔야 하겠죠. 예를 들어서 제가 체육관에 가는 시간을 내기 위해서 술자리를 하나 끊어야 한다거나. 다른 모임을 가는 것을 바꿔야 한다거나. 이런 변화를 주어야 하잖아요. 음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내가 음식을 잘 해먹는다, 라는 입장이 되려면 칼질을 잘해야 된다거나 양파를 잘 볶는 기술을 익혀야 된다거나 생각하지만 실은 이전에 어떤 음식을 해먹는 쪽으로 나의 삶의 우선순위를 재편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그냥 내가 기술만을 갖고 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요. 우리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상황이 집에서 퇴근하다가 집 앞 마트에서 눈에 띄는 대로 재료를 사고 식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사실 아니거든요. 여러 가지 정보랄지 전략이랄지 그런 것들이 사실 필요합니다.

저는 어차피 이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마트를 매일 가기도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시기가 기본적으로 어려운 입장이죠. 그 상황에 맞춰서 제가 일주일에 몇 번 밥을 해먹을 수 있다면 그에 맞춰서 장 보는 패턴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시고요. 또 모든 선택이 의식적일 수밖에 없어요. 두부 하나를 먹더라도 저는 오늘 나의 직업적인 상황에서 여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를 놓고 고민을 해야 되거든요. 거기까지 하시라고 제가 말씀드린다면 지나친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것에 필요 이상의 부담을 얹었을 때에 재미가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도 말씀드립니다. 현재 우리에게 집밥이라는 것이 좀 과장되어있다. 집밥이라는 것이 항상 너무나 좋은 것처럼 생각되는데 사실은 그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루에 세 끼니씩 먹는다면 일주일에 스물 한 끼를 먹는데요. 그 중에서 점심을 대부분 직장인들은 밖에서 드실 거고 아침 안 드시는 분들도 많을 거고 그러면 과연 내가 집에서 해먹을 수 있는 끼니가 몇 끼나 되겠냐는 거죠. 저는 집에서 일하니까 스물 한 끼를 대부분 집에서 먹습니다만 그게 아니라고 하면 사실 집밥 같은 건 할 필요가 어쩌면 없을 수도 있고요. 그냥 그 대안이 되는 것을 잘 찾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임근준  미술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상의 요소들을 훔쳐와서 계속 모사, 모방, 미메시스 하면서 서로 분별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고 하면 지금 시대의 특징은 결국은 일반인, 소비자 입장에서 예술이나 기타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소실점의 상정이라고 하는 건 저는 일상 삶의 패턴을 미학화하고 그것을 다시 재윤리화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요. 힙스터 문화 많은 사람들이 비웃지만 저는 힙스터 문화가 다음 번 단계로 전치될 수 있는 가능성도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재 청년세대가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활동들도 장소특정성이라고 하는 전대의 방법을 넘어서서 시간이나 기회특정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결국은 이제 일상 삶의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미학화하고 윤리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여기에서 중요한 게 저는 미와 윤리라고 하는 게 왕년에는 둘이 별개로 나누어졌지만 어쨌든 뿌리는 하나잖아요. 이게 다시 나누어져서 합쳐지고 있는 지점이 2010년대 중반의 특징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이제 누구나 다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단계라고 하는 게 지나갔다고 하면 그걸 꿈꾸던 단계가 지나갔다고 하면 일반 소비자로서도 기대감소시대에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취할 수 있는 삶의 라이프 스타일에 성찰성을 부여해서 특별한 비평적인 미학화를 시도하는 게 저는 우리 시대에 가능한 지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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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3  이용재 선생님께 드리는 질문인데요. 제가 이때까지 선생님 블로그를 거의 다 봤는데요. 딱 한 가지 생각이 들었던 게 이 선생님은 밥을 먹으면서 별로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객석 웃음) 저도 이제 큰 문제가 따라 공부를 하면서 저만의 기준이 생겼잖아요. 그 기준을 가지고 생각을 할 때 생각을 곱씹을수록 나쁜 점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근데 1인당 7만원 10만원이 넘는 식사를 하면서 그런 기분이 들면 즐겁지가 않잖아요. 저 같은 소비자 입장에서. 선생님은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씁쓸함의 밸런스를 어떻게 찾는지 궁금합니다.

이용재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일반적인 소비자와 좀 다른 입장에 있는 거겠죠.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 대상을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거는 사실 납작하게 그 결과를 맛있다 맛 없다로 가져가는 게 저의 목표가 아니고요. 제가 그것을 놓고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그래서 이게 음식 평론을 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이랄까요. 저는 과정을 생산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것을 왜 이렇게 평가를 내렸나.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표현을 해서 보여주는 것. 그것이 좋다 나쁘다의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씁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50만원 주고 밥을 먹었는데요. 50만 원짜리 식사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충족이 안 되었을 때는 되게 큰 그림에서 좌절이 되죠.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 국면이겠죠.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제안할 수 있는가. 그렇게 봅니다.

관객4  김용언 편집장님께 질문이 있는데 저는 좀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게 평론가 분들이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 공정성 때문에 거리를 유지한다든지 나중에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게 솔직히 더 많이 유리한 입장에 계신 분들이라면 비평을 할 때 좀 날카롭게 해주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좀 더 각오를 해주셨다면 좋겠다는 게 약간의 각오와 바람이고요. 제가 <프레시안북스> 서평 되게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그때 제가 생각했던 게 되게 무난한 이야기들이 많았다고 여겨져요. 좋은 글들도 많았지만 예를 들면 제가 기억하는 건 공공도서관이나 그런 이야기들이라든지 책들이 있었는데 그런 책들 같은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글을 썼던 것일 텐데 굉장히 무난하고 거의 책 소개 정도였어요. 사실은 저는 노이즈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왜냐면 그거는 책 광고하는 카피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사실은 오히려 뭔가 날카로운 걸 기대하고, 학교나 대학원 같은 데서 훈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서평을 통해서 훈련 할 수가 있는데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너무 무난하게, 제가 느끼기에는 너무 무난하게 가다 보니까 보는 사람들이 훈련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미스테리아> 잡지를 하실 때 한 작품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비평가들이 좀 더 세게 얘기를 할 수 있는 장 같은 거를 계획을 하고 계신지 그런 게 굉장히 궁금하거든요. 그런 게 솔직히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갖게 하기도 하고 저희한테는 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뭐 학술 대회를 간다든지 그런 식의 학습의 장이 마련된 사람들은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밀도 높은 이야기를 접해야 되는데 평이한 글들이 나와 있는 블로그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런 건 정말 네트워크 있어야 하고 교수님이 소개를 해주거나 선배들이 이어준다거나 그런 게 없으면 저희한테는 잡지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런 관련된 글 같은 게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김용언  지금 말씀하신 부분은 사실 매체를 만들 때 제일 힘든 부분 중 하납니다. 안 좋은 건 안 좋다고 말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요. 영화지를 예로 든다면, <키노> 같은 잡지가 90년대 중후반에 그 역할을 수행했었죠. 정말 시원하게 비판하고 ‘아닌 건 아니다’라면서 한국영화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으로 얘기를 했었어요.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때 영화산업이 생성단계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어떤 산업이 폭발 단계에 이르기 이전 진행 단계에서는 그런 매체들의 위치가 조금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한국영화계가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이 되고 홍보 마케팅이라는 게 굉장히 특화가 되고 더불어서 광고비라는 개념이 중요해지면서 어느 순간 영화 제작사 배급사 홍보사가 전문지의 ‘갑’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광고를 주거든요. 광고비가 없으면 매체를 만들 수가 없어요. 정말 표지가 될 수 없는 영화인데도 광고비 때문에 이 영화를 표지에 내세워야만 하고 그 영화에 대해서 비판적인 얘기를 쓰기가 굉장히 애매해지는 순간들이 매주 옵니다. 한국 영화 산업이 몇 년 사이에,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에 엄청나게 급성장하면서 찾아온 급격한 변화죠.

이건 영화지의 극단적인 예가 아니냐고 한다면, 다른 매체에는 또 다른 고충이 있습니다. <프레시안북스>에서도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센 글을 실으려고 노력을 해요. 왜냐면 저희는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라는 신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욕을 하더라도 이 글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이후의 과정이 사람을 매우 지치게 할 때가 많습니다. 편집부로 독자들의 항의 전화가 오고 필자 선생님이나 관계자들로부터 장문의 이메일이 오기 시작하고….이게 단지 평론가와 창작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매체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그런 사적인 인간관계에 휘둘리게 되는 거예요. 제 말은 그게 싫어서 일을 안 한다는 뜻이 아니고요. 말씀하신 독자 분은 정말 훌륭한 소수의 독자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 글들을 통해 훈련을 하고 정보를 얻고 싶어하시는 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실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느끼거나 혹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것은 나에 대한 공격이다, 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논쟁과 공격 자체가 생산적으로 나가기가 힘든 측면이 있더라고요. 준비하고 있는 잡지 <미스테리아>에서는 말씀하신 부분을 충분히 다 살리려고 노력 중인데, 아직까지는 필자의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프레시안북스> 할 때도 그렇고 항상 좋은 필자를 찾는 게 무척 어렵습니다. 왜 그렇게 무난한 내용의 글밖에 없느냐고 느끼시는 데에는, 아마 그 이유가 클 것 같아요. 서평 담당자도 모든 책을 다 알지 못해요. 보도 자료를 보면서 내용을 대충 파악을 하고 필자를 고를 때, 많은 경우에는 이 주제를 연구하시는 전문가를 찾는 게 그나마 빠른 길입니다. 예를 들어 폴란드 작가의 작품이 초역되었다고 하면 폴란드 문학 전공자를 찾아 헤매기 시작해요. 그 분이 논문이라든가 다른 연구 작업을 출간하신 분이라면 절박한 기대감을 갖고 청탁이라는 모험을 걸어봅니다. 그 모험이 좋은 결과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정말 무난한 글일 때가 많아요. 왜냐면 이런 식으로 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에게 저희가 무리한 부탁을 드린 거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렇게 50대 50의 리스크를 안고 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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